항목 ID | GC02900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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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于勒 |
영어음역 | Ureuk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 |
집필자 | 이형기 |
[정의]
신라 가야금의 악성(樂聖).
[개설]
우륵(于勒)의 출생과 성장 및 구체적인 활동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삼국사기(三國史記)』 ‘악지(樂志)’에 성열현(省熱縣)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의 고기(古記)에 가야국 가실왕(嘉實王)이 당의 악기를 보고 가야금을 만들었다고 한다. 왕이 여러 나라의 방언이 각각 다른 소리를 내니 어떻게 일정하게 할 것인가?라면서 악사 성열현 사람 우륵에게 명하여 12곡을 짓게 하였다. …… 우륵이 지은 12곡은 1. 하가라도(下加羅都) 2. 상가라도(上加羅都) 3. 보기(寶伎) 4. 달이(達已) 5. 사물(思勿) 6. 물혜(勿慧) 7. 하기물(下奇物) 8. 사자기(師子伎) 9. 거열(居烈) 10. 사팔혜(沙八兮) 11. 이사(爾赦) 12. 상기물(上奇物)이다."
여기에서 보이는 우륵 12곡은 가야 각국의 방언을 일원화한 것으로 각 지역의 음악을 이해하고 이를 기본으로 편곡하여 대가야 국왕의 치적을 찬양하는 곡이었을 것이다. 이는 노래가사를 짓는 데 국가 의례의 절차 및 규범과 왕실 역사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가능한데, 우륵은 이러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여기에는 불교적인 색채도 보인다. 12곡 중 8번 사자기는 불교 사원에서의 사자춤을 가리키는데, 우륵 역시 불교의 악을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보면 우륵은 당대의 대가야 문화를 대변할 수 있는 학문적 소양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가계]
우륵의 가계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태어난 성열현은 경상남도 의령군 신반, 대구광역시 불로동 일대, 고령설 등이 있지만 의령설이 가장 유력하다.
[활동사항]
우륵은 520년을 전후하여 가실왕의 부름을 받아 대가야 왕경(王京)으로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대의 대가야 문화를 대변할 정도의 학문적 소양을 갖추고 있어 가실왕이 그의 능력을 익히 알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540년 이후 백제와 신라의 압박이 현실화되는 가운데 가야 제국의 자구 노력은 실패하고, 가야 소국들은 각기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가야 내부마저 기강이 문란해지고 외부 위협에 둔감해지는 등의 정치적 혼란으로 우륵은 신라로 망명하였다.
진흥왕은 우륵을 국원경(國原京)[현 충주]에 살게 하면서 계속 악사로 활동할 수 있게 하였다. 악곡을 만들어 진흥왕 앞에서 연주를 하기도 하고, 왕으로부터 명을 받은 제자들에게 전수하기도 하였다. 신분적으로도 상당한 대우를 받았으나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12곡이 제자들에 의해 5곡으로 정리되어 신라의 대악으로 지정되었는데, 대악은 국가 의례에 사용되었던 음악이다. 그의 음악은 대가야뿐만 아니라 신라에서도 빛났지만, 그는 온전한 대가야인으로서도 신라인으로서도 활동하지 못하고 주변인의 삶을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