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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0911
한자 崔致遠
영어음역 Choe Chiwon
이칭/별칭 고운(孤雲),해운(海雲),문창후(文昌候)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위은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유학자|문장가|문신
출신지 경상북도 고령군
성별
생년 857년연표보기
본관 경주
대표관직 부성태수

[정의]

통일신라 시대의 유학자이자 문장가이며 문신.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해운(海雲). 아버지는 경주 사량부(沙梁部)[또는 본피부(本彼部)] 출신의 최견일(崔肩逸)이다.

[활동사항]

최치원(崔致遠)[857~?]은 868년(경문왕 8) 12세의 어린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 가서 874년(경문왕 14)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 876년(헌강왕 2) 당나라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県尉)가 되었다. 887년 표수현위를 사직하고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駢)의 추천으로 관역순관(館驛巡官)이 되었다. 879년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営兵馬都統)이 되어 이를 칠 때 고변의 종사관(從事官)으로 4년간 군막에서 표(表), 장(狀), 서계(書啓), 격문(檄文) 등을 제작하면서 문명을 떨쳤다.

그 공적으로 879년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승차되었으며 겸하여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았고, 882년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885년(헌강왕 11) 신라로 귀국하여 시독겸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서서감지사(瑞書監知事)에 임명되었다. 890년(진성여왕 4) 대산군(大山郡)[현 전라북도 태인군], 천령군(天嶺郡)[현 경상남도 함양군], 부성군(富城郡)[현 충청남도 서산시] 등지의 태수를 역임하였다.

893년(진성여왕 7) 하정사(賀正使)로 임명되었으나 도둑들의 횡행으로 가지 못하고, 뒤에 다시 사신으로 당에 갔다. 894년(진성여왕 8) 시무책 10여 조를 왕에게 올려서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고자 하였다. 진성여왕은 그에게 아찬(阿湌)을 내렸으나 정치 개혁안은 실현되지 않았던 것 같다. 만년에 가야산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친 것으로 보인다.

[학문과 사상]

신라 말 6두품 출신의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문장가이다. 많은 시문을 남겼으며, 황소의 난 때 쓴 「토황소격(討黃巢檄)」이 명문으로 유명하다.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승려들과 교유하고 불교 관련 글도 많이 남겼는데, 화엄종과 선종에 특히 주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외 노장 사상과 풍수지리설에도 이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신촌리에 있는 정자 벽송정에는 최치원(崔致遠)의 시문이 남아 있다.

[저술 및 작품]

저술로는 시문집으로 『금체시(今體詩)』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100수 1권, 『잡시부(雜詩賦)』 30수 1권이 있다.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1부 5권, 『사륙집(四六集)』 1권, 문집 30권 등이 있다. 사서로는 『제왕연대력(帝王年代暦)』이 있다. 불교 관계 저술로는 『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 1권, 『법장화상전(法欌和尙傳)』, 『석이정전(釋利貞傳)』, 『석순응전(釋順應傳)』, 『사산비명(四山碑名)』이 있다. 글씨도 잘 썼다고 하는데,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은 쌍계사의 「진감선사비문(眞鑑禪師碑文)」이 유명하다. 특히 고령군과 관련하여 대가야의 건국 신화를 『석이정전』에 수록하였다. 그 내용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령현조에 보인다.

[상훈과 추모]

1020년(고려 현종 22)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고, 이듬해 문창후(文昌候)에 추시되어 문묘에 배향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 경주의 서악서원(西嶽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柏淵書院), 포천의 고운영당(孤雲影堂), 대구 계림사(桂林祠)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관** 디지털고령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이용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3.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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