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8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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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兆年 |
영어음역 | Yi Jonyeon |
이칭/별칭 | 원로(元老),매운당(梅雲堂),백화헌(百花軒),문열(文烈)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위은숙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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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 |
성별 | 남 |
생년 | 1269년 |
몰년 | 1343년 |
본관 | 성주 |
대표관직 | 예문관대제학 |
[정의]
고려 후기 고령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원로(元老), 호는 매운당(梅雲堂)·백화헌(百花軒). 증조할아버지는 이돈문(李敦文)이며, 할아버지는 이득희(李得禧)이고, 아버지는 경산부(京山府) 향리 이장경(李長庚)으로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장인은 경산부사 정윤의(鄭允宜)이다. 아들로 검교시중(檢校侍中) 이포(李褒)를 두었고, 손자로는 이포의 아들인 이인복(李仁復)·이인임(李仁任)·이인미(李仁美)·이인립(李仁立)·이인달(李仁達)·이인민(李仁敏)이 있다.
[활동사항]
이조년(李兆年)[1269~1343]은 지금의 고령군 성산면에서 태어났다. 1294년(충렬왕 20) 향공진사(鄕貢進士)로 과거에 급제하여 안남서기(安南書記)에 임명되었고, 여러 관직을 거쳐 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가 되었다가 지합주(知陜州)를 거쳐 비서랑(秘書郞)이 되었다. 1306년(충렬왕 32) 왕유소(王惟紹)와 송방영(宋邦英) 등이 충렬왕 부자를 이간시키고 서흥후(瑞興侯) 왕전(王琠)을 충렬왕의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았으나, 이에 연루되어 귀양 갔다. 이후 귀양에서 풀려나 고향인 성산에서 은거하였다.
충숙왕이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을 때 심왕(瀋王) 왕고(王暠)가 충숙왕의 왕위를 빼앗으려 하였을 때 분격하여 홀로 원에 가서 충숙왕을 위한 글을 중서성에 올렸는데, 원 조정에서는 그의 행동을 높게 평가하였다. 충숙왕 귀국 후 감찰장령(監察掌令)이 되었고 전리총랑(典理摠郞)을 거쳐 관동존무사(關東存撫使)로 나갔다가 다시 판전교사(判典校事)를 배수 받고 군부판서(軍簿判書)를 겸임하였다.
이후 조적(曹頔)을 비롯한 심왕당(瀋王黨)이 끊임없는 모략으로 충숙왕으로 하여금 왕위를 심왕에게 선양하게 하려 하였으나, 이조년은 한종유(韓宗愈) 등과 함께 극력 반대하여 이를 저지시켰다. 이후 충혜왕을 따라 원을 내왕하면서 정치적 어려움에 빠진 충혜왕을 위해 노력하였다. 충혜왕이 복위하여 본국으로 돌아와 공로를 평정할 때 정당문학(政堂文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제수받았고, 충혜왕의 실정에 대해 여러 차례 직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343년(충혜왕 복위4)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시로 「다정가(多情歌)」 한 수가 남아 있는데, 『해동가요(海東歌謠)』, 『청구영언(靑丘永言)』,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에 실려 있다. 또한 매의 사육서인 『응골방(應鶻方)』이 필사본 1책으로 남아 있다.
[상훈과 추모]
1342년(충혜왕 복위3) 충혜왕을 시종한 공로로 1등 공신과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성근익찬경절공신(誠勤翊贊勁節功臣)에 녹권되었고, 벽상(壁上)에 도형(圖形) 되었으며 그의 부모와 처자에게 토지와 노비가 내려졌다. 시호를 문열(文烈)이라 하였다. 공민왕 대에는 성산후(星山侯)로 추증되었고, 충혜왕 묘정에 배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