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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0813
한자 申叔舟
영어음역 Sin Sukju
이칭/별칭 범옹(泛翁),희현당(希賢堂),보한재(保閒齋),보사공신(保社功臣),문충(文忠)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용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경상북도 고령군
성별
생년 1417년연표보기
몰년 1475년연표보기
본관 고령
대표관직 영의정

[정의]

조선 전기 고령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보한재(保閒齋). 아버지는 공조참판을 지낸 신장(申檣)이다.

[활동사항]

신숙주(申叔舟)[1417~1475]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는데, 자라면서 읽지 않는 책이 없었다. 1438년(세종 20) 초시와 복시에 연달아 장원하였고, 1439년 문과 제3인으로 급제한 뒤 집현전부수찬이 되었다. 장서각에 들어가 평소 보지 못한 책을 읽고 동료를 대신하여 숙직하면서까지 밤늦도록 공부하기 일쑤였다. 세종은 그가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어의(御衣)까지 하사하면서 칭찬하였다.

1442년(세종 24) 훈련주부가 되었다. 이때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게 되어 글 잘하는 신하를 서장관으로 삼아야 했는데, 신숙주가 뽑혔다. 일본에 이르자, 그의 재주를 듣고 시를 써 달라는 사람이 몰려들었는데, 즉석에서 붓을 들고 시를 줄줄 써 주어 모두가 감탄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쓰시마[對馬島]에 들러 무역 협정인 계해조약(癸亥條約)을 맺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가장 공이 컸는데, 마침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이 죄를 짓고 요동에 귀양 와 있어 열세 차례나 왕래하면서 음운에 관한 것을 의논하였다. 신숙주는 한 번 들으면 곧 이해하고 조금도 어김이 없어 황찬이 매우 신기하게 생각하였다고 한다.

1447년(세종 29) 가을 중시(重試)에 4등으로 합격하여 응교에 특진되었다. 세조가 즉위하기 전 사은사 서장관으로 연경(燕京)에 따라갔다. 세조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를 때 이에 가담하였으며, 이 일로 가까운 친구인 성삼문과 멀어지게 되었다.

1457년(세조 3) 우의정, 1459년(세조 5) 좌의정을 거쳐 1460년에는 함길도도체찰사가 되어 야인들을 소탕하고 돌아왔다. 1462년(세조 8) 영의정에 올랐다. 이후 사임하였다가 세조가 승하하고 어린 예종이 즉위하자 원상(院相)으로 승정원에 들어가 서정(庶政)을 처결하고 남이 장군을 숙청하였다. 예종이 승하하고 성종이 즉위한 뒤 또 공신의 호를 내리고 영의정에 임명하였다.

[저술 및 작품]

『경국대전(經國大典)』, 『세조실록(世祖實錄)』, 『예종실록(睿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일본과 여진의 지도를 만들었으며, 왕명으로 『동국통감(東國通鑑)』, 『오례의(五禮儀)』도 편찬하였다.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와 『보한재집(保閒齋集)』을 남겼다.

[상훈과 추모]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남이 장군을 숙청한 공으로 보사공신(保社功臣)의 호를 받았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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