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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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負褓商團-命脈-高靈商務社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임경희 |
[개설]
경상북도 고령군에는 조선부보상단의 후신(後身)으로 알려진 상무사 조직이 현재까지 남아 옛 상인 단체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1866년 조직되어 지역의 시장을 장악했던 고령상무사 좌사계와 1899년 조직되어 활동해 오던 고령상무사 우사상계가 바로 그들이다.
고령상무사 좌사계는 등짐을 지고 다니던 부상(負商)이, 고령상무사 우사상계는 보따리를 매고 다니던 보상(褓商)이 그 주요 구성원이다. 경상북도 지역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이들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6·25전쟁, 산업화와 도시화를 거치는 와중에서도 묵묵히 옛 상인 단체의 풍습을 전승하며 조선 상인의 전통을 이어 왔다. 140년 동안 별개의 단체로 활동해 오던 두 조직은 2005년 고령상무사 상계(商契)로의 통합을 시도했다. 1980년대 이후 쇠락일로를 걷던 이들이 지역 상가연합회의 상인들을 새로운 계원으로 받아들이고, 2008년에 고령군청이 나서서 고령상무사를 건립하여 이들의 유품을 한자리에 모으고 전통적 풍습을 이곳에서 재현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명실공이 조선부보상단의 전통과 가치를 되살리는 전통 상인 단체로 새 출발하고 있다.
[고령상무사와 조선부보상단]
상무사란 원래 대한제국 시기인 1899년 2월 조칙(詔勅)에 의해 설립된 상인 단체로 행상단인 좌사(左社)와 우사(右社), 전(廛)을 운영하던 상인, 유기(鍮器)와 망건(網巾) 등 8가지 품목을 판매하던 상인[八商] 등을 함께 관할하였다. 이중 좌사와 우사는 각각 부상과 보상을 일컬으며 합쳐서 보부상이라고도 한다.
부보상들은 조선 개국 초부터 전국에 흩어져 활동을 시작했는데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직후 대원군이 보부청(褓負廳)을 설립하면서 전국적 조직으로 정비되었다. 고령 지역에 좌사계가 조직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이들은 중앙에는 팔도도접장을 두었으며, 각 도와 읍에는 임소를 설치하여 도접장과 접장을 두었다. 중앙의 팔도도접장은 한성부에서 임명했고, 도접장과 접장은 해당 지역 사람이 맡았다.
부보상단은 이후 몇 차례 관할 기관이 바뀌며 운영되다가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근대적 상회, 상사 등과 함께 상무회의소로 개편되었고 1899년 상무사가 설립되면서부터 다시 이에 속하게 되었다. 상무사는 중앙에는 사장을, 도와 군에는 각각 분사장(分社長)과 분사무장을, 지역 상무사에는 반수와 접장을 두었으며 사장은 의정부참정이, 분사장은 각 도 관찰사가 맡도록 했다. 고령상무사 우사는 이때 조직되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당시 전국의 부보상단은 지역 사정에 따라 많으면 8개, 적으면 두세 개 정도의 군읍(郡邑)을 관할하는 상단으로 정비되었고 고령 지역 부보상단은 일대의 읍면들을 관할 구역으로 삼아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04년 일제의 상권 침탈로 인해 상무사가 해체되었다. 그 후 이들은 일시 상민회(商民會)에 이관되었다가 다시 진명회(進明會)에 소속되었고 공진회(共進會)가 발족하자 이곳에 이속되지만 일제의 식민지 경영이 본격화하면서 결국 시장에서 쫓겨나 더 이상 상인 조직으로 기능할 수 없게 되었다.
1920년 여름 각 지역의 부보상단은 상무연구회, 상리사, 상무조합, 상무사 등의 명칭을 내걸고 남은 조직원들을 규합하고 이전 시장에서 누렸던 특권을 돌려줄 것을 조선총독부에 탄원하였다. 이들의 청원에 조선총독부는 상무사만을 잔존하게 했고 이것이 지금까지 충청도와 경상도 일부 지방에 남아 조선부보상단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고령상무사도 이런 과정을 거치며 조선부보상단의 명맥을 이어오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령상무사의 주요 인물들]
고령상무사 좌사계 설립 초기 우두머리인 반수 직은 오랫동안 유(兪)씨와 박(朴)씨 가에서 번갈아 맡았다. 조직은 점차 반수-접장-반수공원-본방공원-도공원-별공원- 본소공원-별유사-도집사-문서공원의 위계를 갖추었으며 1894년 갑오개혁 때에 일시 혁파(革罷)되어 1900년까지 활동이 중단되었으나 1901년부터 재가동되었다.
반수와 접장을 포함한 공원의 수는 많을 때는 13~14명, 적을 때는 2~3명 정도로 다른 지역의 상단에 비해 상당히 작은 규모였다. 이후 반수 직은 한약방을 경영했던 남채우(南采祐)[1921], 군수를 역임한 김구현(金龜鉉)[1925], 초대 고령읍장 유강식(兪疆植)[1929], 고령 굴지의 재력가였던 정운한(鄭雲漢)[1931] 등도 맡았다.
그러나 고령상무사 좌사계는 일제의 노골적인 경제 침략으로 갈수록 활동이 위축되면서 지역 시장에서 영향력을 잃게 되었고 1927년에는 길흉상조(吉凶相助), 병자구호(病者救護), 사자감장(死者勘葬)을 계원의 의무로 강조하는 친목계로 정비되었다. 조직의 규모도 점차 작아져 징용과 징병이 본격화하는 1944년 이후로는 반수, 접장, 본방만 선출하는 수준이었다.
6·25전쟁 이후 고령상무사 좌사계는 부반수, 부접장의 직임을 일시 되살리는 듯했지만[1952년] 이듬해에 다시 3인 체제로 회귀했고 1982년 이후로는 아예 반수-접장만을 선출하는 수준으로 조직이 더욱 축소되었다. 그렇지만 1980년대 중반에 상여와 차일, 관복 등을 계의 공동재산으로 구입하고 필요로 하는 지역민에게 임대하는 등 길흉사에 관한 의무만큼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고령상무사 우사상계는 지역에서 상점[廛]을 운영하는 사람과 보상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우사상계가 설립된 시기가 갑오개혁 이후 좌사계가 일시 활동을 중단하고 있었던 때였던 만큼 지역 시장도 이들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반수-접장-별임-본방 체제로 조직을 운영하였다.
반수 중 대표적인 이로는 1906년 고령군수 서리였던 이봉조(李鳳朝)와 이봉조의 둘째 아들 이정근(李正根), 영신학교 설립자 이봉구(李鳳九), 초대 고령군수[1948년]를 지낸 이홍직(李洪直), 고령군 교육감(1954~55년)을 지낸 유민식(兪敏植), 좌사반수 정운한의 아버지인 자산가 정극원(鄭極源), 농민상회, 고령양조장 사장 정춘택(鄭春澤), 현 고령시장 개설자인 이상봉(李相鳳), 초대 면의원 김홍달(金洪達)과 이동조(李東琱), 초대 고령농협장 김진수(金瑨洙), 금광을 경영하던 김진강(金進鋼), 6·25전쟁 때 고령으로 피난해 영생병원을 경영하던 유일성(劉一晟) 등이 있다.
좌사계와 우사상계의 반수들은 일제의 경제 침탈이 시작되던 시기에는 함께 고령군 자치민의소의 사정장(司正長), 부회장 등으로 참여하여 지역의 식산흥업운동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고령에 전해지는 조선부보상의 풍속들]
부보상의 복장은 ‘짚신에 감발치고 패랭이 쓰고 꽁무니에 짚신차고 이고 진’ 모습이 일반적이다. 보상은 물건을 보자기에 싸서 머리에 이거나 끈으로 묶어서 지고, 부상은 상품을 지게에 얹어 등에 지고 다니면서 장사했다. 패랭이 양쪽에는 어른 주먹크기만한 솜뭉치가 달려 있었다. 부상은 또 지게를 고정시키기 위해 물미장(勿尾杖)을 가지고 다녔다. 물미장의 속은 비어있으며 표면에 용무늬가 새겨진 것, 쌀 미(米)자가 새겨진 것의 두 종류가 전승되는데 고령상무사에 전하는 물미장에는 쌀 미자가 새겨져 있다.
조선부보상단이 전승하고 있는 풍속 중 가장 특이한 것은 공사(公事), 또는 공문제(公文祭)라 할 수 있다. 공문제란 매년 한차례 전국의 상무사 구성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 공문(公文)을 받들고 총회를 치른 후 여흥을 즐기는 행사이다. 각 지역에서도 그들이 시조(始祖)로 받드는 백토산(白兎山)과 지역의 선임(先任) 반수·접장을 기리는 제사를 지낸 후 총회를 개최하고 여흥을 즐기는 행사가 매년 열렸다.
고령상무사 좌사계에서는 매년 음력 1월 20일 총회를 개최하고 제사를 모셔왔다. 총회와 제사는 대개 접장의 집에서 치러지는데 계원들은 이날의 제사를 대제(大祭)라고 일컬어 왔다. 그 절차와 제사 방식 등을 보면 부보상단의 옛 공문제 의식을 전승하는 것이 틀림없다. 공문이 들어 있는 함(函)은 총회와 대제가 끝나면 신임 접장 집으로 옮겨지며 계원들은 이 공문함을 가족보다 더 소중하게 취급하였다.
총회와 대제의 날짜는 1980년대 후반 곽차효(郭且孝)가 접장을 맡았던 시기부터 삼월삼짇날[음력]로 바뀌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날씨가 너무 추워 제사를 모시기 힘들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대제를 지내는 날 계원들은 음복 후 한마당 농악놀이로 흥을 돋우었지만 지금은 이런 여흥이 없어졌다.
고령상무사 좌사계에서는 대제 외에 매년 3월 삼짇날, 4월 초파일, 5월 단오, 7월 백중, 9월 중양절에 시사(時祀)를 올려왔다. 시사를 올리는 것은 속절(俗節)에 제철 음식을 올리던 옛 의식을 따라 정한 듯하다. 1950년대 까지만 해도 계원들은 접장이 되어 이런 의식을 행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고령상무사 우사상계에서도 매년 3월 16일과 10월 25일[음력] 정기 대제를 올리고 총회를 개최하는 한편 정월 회(晦)일과 7월 백중, 8월 30일[음력]에는 시제를 모셔 왔으며 대제 후에는 회추 모임을 가졌다. 그러나 회추 모임과 제사 모시는 일은 여러 가지 이유로 점점 위축되었고 결국 3월과 10월 두 차례의 대제만으로 간소화되었으며 2008년 좌사계와 통합한 이후로는 매년 음력 3월 3일 봄 대제 및 총회, 음력 9월 9일 가을 대제를 올리는 것으로 바뀌었다.
또한 고령상무사에는 계원과 읍민의 번영과 평안을 기원하는 상무사 지신밟기가 전승되어 오고 있다. 원래 좌사계의 풍속인 이 놀이는 제사 비용을 추렴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다. 지신밟기는 정월 대보름 아침 계원들이 꽹과리·매구·징·장구·북 등 농악기를 준비해서 접장 집에 모이는 것으로 시작한다.
농악대를 앞세운 일행은 계원 모두의 집을 해가 질 때까지 차례로 도는데, 일행 중 암매구를 치는 사람이 대문 앞에 서서 ‘주인 주인 나오소. 좌사손님 들어가오. 사해(四海) 안에 사는 사람 서로서로 형제인데 같은 고을 백민(白民)끼리 남남 보듯 할 수 있소’ 로 이어지는 ‘고령상무사 지신밟기요’ 가사를 선창하면 나머지 사람들이 가사를 따라 부르면서 대청·큰방·부엌·곳간·마구간 등을 차례로 밟는다. 농악대를 맞이한 집에서는 답례로 쌀이나 현금 등을 상 위에 올린다. 계원이 아니어도 원하는 집이 있으면 찾아가 그 가정의 무고안택(無故安宅)을 빌어 주었다.
[고령에서 되살아나는 조선부보상단]
1960년대 후반 이래 고령상무사 좌사계와 우사상계의 의례와 풍속은 급격한 변화에 직면하게 되었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전승되던 의식이 사라지는 데다 계원들조차 하나 둘 고향을 떠나거나 유명을 달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사 절차라든가 제수, 제기 등도 그때그때의 형편에 따라 바뀌게 되어 옛 형태를 찾아보기 힘들어 졌고 상무사 지신밟기도 사라졌다.
신입 계원이 적어 조직을 유지하는 일조차 힘들어진 두 단체는 급기야 2005년 10월 11일 통합 총회를 개최하고 조직의 명칭을 ‘고령상무사 상계(商契)’로 개칭하는 새로운 규약을 작성하기에 이르렀다. 이어 3년 뒤인 2008년 2월 22일 두 단체의 재정을 통합하고 좌사계 반수였던 제준식(諸俊植)을 반수로, 우사상계 접장이었던 김천학(金千鶴)을 접장으로 선출하여 통합된 고령상무사가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지역의 상가번영회 사람들도 신입회원으로 가입시켰으며 이와 더불어 고령군청이 총사업비 8억 500만 원을 들여 2,215㎡ 부지에 콘크리트 목조 팔작 지붕의 고령상무사 기념관을 건립하여 같은 해 4월 14일 고유식(告由式)도 올렸다.
경상도 지역 최초로 건립된 고령상무사기념관과 고령상무사 구성원들을 통해 조선부보상단이 이제 다시 이 땅에서 살아나고 있다. 조선조 오백 년 동안 독특한 조직과 운영체계 및 윤리규정을 자랑하던 한국의 전통 상인 단체, 조선부보상단의 삶과 문화는 고령상무사와 함께 앞으로도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