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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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洛東江-茶山面-大邱-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경희 |
[개설]
고령군의 찬란한 역사와 문화는 낙동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 고령 지역은 낙동강 총 연장의 20%에 해당하는 55㎞의 연안을 끼고 있어 옛날부터 왜관과 함께 낙동강 중류의 중심 고장이 되었다. 대가야읍 고아리 일대의 지명이 ‘배울’·‘뱃골’·‘주곡(舟谷)’인 데서도 알 수 있듯 이곳은 대가야 시절 배를 건조하던 곳이기도 했다.
고령군에는 잘 알려진 것처럼 개경포(開經浦)와 사문진(沙門津) 외에 15개의 나루가 존재했는데, 그 중 4개가 다산면에 위치하고 있었다. 호촌2리의 사문진나루터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면과 연결되는 곳이어서 사람들의 왕래가 특히 많았고, 이 때문에 곳곳에 여관과 주막이 들어서 있었다. 거기에다 이곳은 옛날부터 향부자 등 약재와 ‘다끼파’의 주산지로 알려져 있어 두 척의 도선이 사람과 물건 들을 양쪽으로 실어 나르기에 바빴다. 그렇지만 1993년 사문진교가 개통되면서 뱃길이 끊어져 나루터와 거룻배, 자동차 엔진을 얹었던 동력선은 역사 속에 묻히고 말았다. 대신 이곳에는 강을 가로질러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과 대구광역시 달성군을 연결하는 길이 780m의 다리가 놓였다. 왕복 2차로였던 사문진교는 2009년 5월 왕복 4차로로 확장되었다.
[행정구역 변천으로 보는 다산면의 역사]
고령군의 동북부 28㎞ 거리에 위치한 다산면은 동으로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면과 옥포면, 북으로는 달성군 다사면과 하빈면, 서쪽으로는 성주군 용암면과 접하고 있다. 다산면은 원래 다사지현(多斯只縣), 또는 답지현(沓只縣)으로 불렸다가 신라 경덕왕 때 하빈현(河濱縣)으로 개칭되어 수창군(壽昌郡)의 속현이 되었고, 고려 현종 때인 1018년 경산부에 소속되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 대구부로 편입되었지만 다시 성주군에 소속되어 다기방(茶基坊), 또는 다산방(茶山坊), 벌지방(伐知坊)이란 지명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개항기인 1906년 다시 고령군에 편입되고,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다산면이 되어 평리(平里)·호촌(湖村)·곽촌(藿村)·상곡(上谷)·좌학(座鶴)·월성(月城)·노곡(蘆谷)·나정(羅亭)·벌지(伐知)·송곡(松谷) 등 10개 리를 관장하였다. 다산면은 현재 19개 리와 20개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산면의 서쪽과 서남쪽은 해발 100m 전후의 구릉지이나 북쪽과 동쪽, 동남쪽은 낙동강의 본류가 이곳을 끼고 흐르기 때문에 넓은 충적 평야와 모래땅이 형성되었고, 토지가 비옥하여 쌀·보리·콩을 비롯한 가지·고추·시금치·미나리·파 등 채소류가 잘 자랐다. 특히 이곳에서는 일찍부터 향부자(香附子)와 생지황·박하·생강·형개 등 50여 종의 약초가 재배되어 대구약령시에 약재로 팔려 나가고 있다.
[낙동강 수운의 중심지 사문진]
다산면의 동쪽 마을인 호촌2리는 모래가 많은데다 다산면으로 가는 관문이라 하여 사문, 또는 사촌이라고 불렸다. 또한 큰절로 가는 관문이라 하여 사문(寺門)이라고도 불렸다. 호촌2리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면 성산리 사문진과 마주하고 있다. 사문진은 낙동강을 따라 올라온 물산(物産)이 유입되는 요충지로,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돛단배나 범선이 드나들며 대소비지인 대구까지 물품을 실어 날랐다.
1940년대 초의 한 기록에 의하면 사문진을 통해 대구에 집산된 물자는 쌀 20만 섬, 콩 10만 섬, 우피 40만 근, 소금 10만 섬, 석유 3만 5천 상자, 성냥 6천 상자, 옥양목 6만 단, 무명 10만 단에 이른다. 또한 상당량의 잡곡과 약재, 잡화, 견·면직류 등이 사문진을 통해 빠져 나갔다. 사문진 물산의 4할 정도는 대구시장에서 소비되었고, 나머지 6할은 대구를 중개지로 해서 전라도·충청도·강원도 등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
원래 사문진에는 조선 성종 때 관청과 민간에서 사용하는 일본 상품을 보관하기 위해 ‘왜물고(倭物庫)’라는 창고가 설치되어 있었다. 남해안을 통해 들어온 일본 상품은 모두 나룻배에 실린 뒤 낙동강을 거슬러 7~8일 만에 사문진에 도착한 뒤 왜물고에 보관됐다. 보관된 물품의 일부는 서울의 왕실과 관아에 보내어지고 나머지는 국내 상인들에게 매매되었다.
따라서 사문진은 왜물고 설치 이후 공무역의 폐단으로 인해 사무역이 다시 부활하기까지 10년 가까이 일본 상품이 보관되고 유통된 조선 유일의 나루라는 명성을 얻은 곳이기도 하다. 이후 사문진의 공무역 기능은 남해안의 포구 도시들에게 빼앗겼지만 대구라는 경제적 배후지를 둔 덕택에 낙동강을 대표하는 나루로서의 명성은 일제강점기 내내 이어져 갔다.
[도선(渡船) 두 척이 하루 70회 왕복하다]
사람과 물건들을 다산면으로 실어 나르고, 대구와 연결시켜 주는 유일한 교통수단은 배였다. 일단 배로 강나루를 건너 화원으로 들어서면 고령을 거쳐 대구까지 운행하는 자동차를 탈 수 있었다. 고령 지역에 처음 자동차가 들어 온 것은 1918년 3월쯤으로, 새로 만들려진 신작로를 따라 현재의 택시 정도 크기의 승합차가 하루 한 번 대구까지 왕복하면서 승객들을 실어 날랐다. 배는 처음 장대를 이용해서 사람의 힘으로 저어 다니는 목선(木船)이 다니다가 여기에 자동차 엔진을 갖다 붙인 통통배로 바뀌고 나중에는 엔진이 달린 동력선이 다녔다.
1985년 6월 1일 도입된 동력선은 10톤 규모로 승객 60명과 자동차 6대를 동시에 운반할 수 있는 규모였다. 배는 두 척을 들여 승객이 몰리는 출퇴근 시간에는 한 시간에 서너 번, 승객이 없는 낮 시간에는 한 시간에 한 번씩 운항했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9시까지 호촌리에서 건너편 화원유원지 버드나무 밑 나루까지 하루 70회 정도 왕복하면서 평균 10여 대의 자동차와 1,000명 정도의 사람을 실어 날랐다. 운임은 1인당 500원이었는데, 다산면 사람들에게는 돈 대신 연간 이용료로 벼를 받았다.
1970년대 말까지만 해도 여름철이면 대구시민들이 백사장이 좋은 이곳 나루터를 찾아 모래찜질을 즐겼지만 도선이 사라진 지금은 나루터의 흔적만 남아 있다. 대신 고령군은 이곳을 수천 톤급 화물선과 관광 여객선이 드나드는 대규모 복합 터미널로 개발할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자전거를 맡아 주던 집, 대남여인숙]
대남여인숙 주인 김관용은 1936년 경상북도 경산군 하양읍 청천에서 태어났다. 그가 이곳으로 이사한 것은 1970년경으로, 고향에서 열심히 기장[栥盛] 농사를 지었지만 불한병 때문에 폐농할 수밖에 없어서 식구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들어왔다. 여기 와서도 한 10년쯤 열심히 농사를 지었지만 기장 농사로는 좀체 수익을 낼 수 없어 나루터 가까운 곳에 집을 하나 더 마련하고 여인숙을 열었다. 여인숙 자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막걸리를 팔던 주막집이었다. 주인을 돈을 벌어 대구로 나간다고 했다.
이곳은 대구와 다산면을 잇는 통로인데다 강 건너가 바로 대구여서 지역의 관공서와 학교에는 대구에서 통근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오가는 사람들이 이곳에 들러 목을 축이곤 하던 터여서 제법 재미가 좋았던 터였다. 지붕과 기둥만 온전했던 집에 문틀을 해 달고, 방 다섯 개를 넣었다. 마당에는 오토바이와 자전거를 보관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었다. 예상했던 대로 여인숙에는 사람들이 넘쳤다. 그때만 해도 지역에는 면사무소 외에 1928년부터 개교한 다산국민학교, 노곡국민학교, 별지국민학교, 1957년 다산고등공민학교로 개교한 다산중학교까지 학교만 해도 4개 교가 있을 정도로 번성한 곳이었다.
학교 선생들은 여인숙에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맡겨 두고 배를 이용해서 대구 집을 오갔다. 주민들은 대구로 볼 일을 보러 가면서 자전거를 맡기기도 했다. 원하는 사람에게는 식사도 제공하면서 이들의 오토바이와 자전거를 맡아 주고 매달 보관료를 받아 살림을 꾸렸다. 오토바이는 한 달에 1,500원, 자전거는 한 달에 700원 내지 800원을 받았다. 스무 대 정도는 아예 단골로 묶어 두었고, 대구에 잔치라도 있는 날이면 마을 사람들의 자전거가 쉴 새 없이 밀려 들어왔다.
그렇지만 시골 여인숙 살림이란 게 슬하의 5남매를 키우고 출가시키기까지 일하는 사람을 따로 둘 엄두를 낼 만큼 확 피는 일이 없으니 부부가 부지런히 몸을 놀려야 했다. 두 살 아래 부인이 나이 열아홉 살에 살림을 나서 지금까지 농사니, 여인숙 일이니 허리 제대로 펼 날이 없었으니 그 고생이 오죽했을까.
방 다섯 개는 어쩌다 마지막 배를 놓친 사람들이 묵고 가는 곳이었다. 방값은 2,000원이나 3,000원씩 받았다. 집에서 나루터까지의 거리가 300m쯤 떨어져 있었지만 물이 많을 때면 물이 집 앞까지 차올라 대문 앞에 배를 댈 때도 있었다. 그렇게 그럭저럭 10년 세월이 흘렀는데, 난데없이 1990년쯤 대구와 사문진을 잇는 다리를 개설한다면서 강둑에 제방을 쌓기 시작하더니, 홍수 때면 아예 강물이 집을 삼켜 버리게 생겼다. 강물이 집 앞까지 들어오던 때도 제방을 쌓기 전까지는 집이 물에 잠기는 적이 없었는데, 제방이 강물의 흐름을 막아 버려 물이 빠질 곳이 없어진 것이다.
비만 오면 땅이 질어져서 출입조차 불편해졌다. 돌을 몇 차씩 실어서 길을 다져 두어도 소용없었다. 이윽고 1993년 다리가 개통되면서 배가 다니던 두 지역은 육로로 연결되었고, 대구에서 통근하던 사람들이 맡기던 오토바이와 자전거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 버렸다. 그 후 10년여, 대남여인숙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다끼파와 향부자의 명성]
다산면은 ‘다끼파’의 주산지이면서 약재인 향부자도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토산품이다. 화원 쪽에 자리 잡은 사문진나루터에서는 매일 오전 파시장이 서고, 평리에서 개설되던 다끼장에는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각지에서 몰려 온 상인들로 정신없이 붐볐다. 다끼파의 주산지는 화원유원지 맞은편 지역인 다산면 호촌2리였는데 8·15해방 직후만 해도 이곳에 살던 40여 가구 모두가 파를 재배했다. 다끼파는 길이가 한 자[약 30.3㎝], 굵기는 어른 엄지손가락 정도로 요즈음 파처럼 길지 않다. 밑기둥에는 흰빛 대신 자줏빛이 감돈다. 겉대를 정리할 때면 파의 향이 워낙 독해서 사람들이 눈물을 줄줄 흘릴 정도였다고 한다.
파는 20개를 한 묶음으로 팔려 나갔는데, 마을 사람들은 지게와 리어카, 달구지에 파를 싣고 강 건너 대구 서문시장까지 물건을 팔러 다녔다. 수확은 1년에 2번, 2~3월엔 푸른 잎만 잘라 팔고 늦가을부터 초겨울까지는 육개장용 올파를 팔았다. 그렇지만 1970년 경부고속국도가 개통되면서 전국 각지의 파들이 대구의 서문시장과 칠성시장, 원대시장 등으로 들어오면서 다끼파는 된서리를 맞아야 했다. 거기에다 1972년 경지 정리가 시작되면서 파 재배지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동안 주요 소비처 중 하나였던 대구 지역 육개장 음식점들이 수요를 줄여 나가면서 고령 다끼파는 점차 옛 명성을 잃어 갔다.
사문진 주변은 지금도 전국 최대의 향부자 생산지로 명성이 자자하다. 강을 따라 광활한 하천 부지를 끼고 있는 곳이어서 안성맞춤인 토질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향부자는 예부터 중국과 인도 등지에서 ‘부인병의 선약’으로 일컬어져 온 약재이자 통경과 정혈, 신경 안정 등에 특효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다산면 노곡리와 곽촌리 일대 주민들은 지난 1991년까지만 해도 248농가에서 향부자를 재배했다. 노곡리에는 현재도 67개 농가가 참여하는 전국 유일의 재배 마을이 전국 생산량의 60%를 수확해 내고 있을 정도다.
2009년 현재 전국 향부자 생산량 615톤 모두가 경상북도 지역에서 재배되고 있으며, 그 중 고령군 다산면은 전국 재배 면적의 80%를 점유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곳은 현재 4대강 살리기 사업에 밀려 경작지를 옮겨야 하는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