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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덕씨의 두 번째 고향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B04020004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내산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장영덕

서울에서 섬유업을 경영하던 장영덕 씨는 1990년대 초 도심공장의 지방이전이라는 서울시 방침에 따라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중소기업이 어렵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잘됐구나 싶었다. 낙천적인 성격 탓도 있지만 힘들 때면 어린 시절 시골생활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며 이겨내곤 했었다. 그러나 막상 적당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여러 곳을 찾아 다녔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다. 경제적인 면 못지않게 아이들 교육문제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공주 신풍이 고향인 선배의 권유로 공주를 찾아오게 되었다. 공주에 들어오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역사와 문화의 도시’, ‘효의 고장’, ‘교육의 도시’ 라는 문구였다.

장영덕 씨는 1992년 공장이 완공되어 가족들과 함께 서울에서 공주 내산리로 이사 오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IMF와 시장개방의 영향으로 공장이 문 닫을 위기에 처했던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사랑하는 가족과 마을 분들의 따뜻한 배려가 있었기에 이겨낼 수 있었다.

공장을 경영하며 마을 분들에게 어깨너머로 배운 농사지식으로 자그마한 텃밭에 각종 채소를 가꾸었다. 작은 씨앗을 뿌려둔 땅에서 매일 매일 조금씩 커가는 채소를 지켜보는 것이 신기하였고 무공해 채소가 식탁에 올라올 때면 가슴이 뿌듯했다.

내산리에 자리 잡은 지도 이제 17년이 넘었지만 내산리는 여전히 신의 축복이 가득하다. 반딧불이 날아다니고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은하수를 바라볼 때면 마음은 어느새 동심으로 돌아간다. 그럴 때마다 어린 시절 외갓집에 놀러갔다가 반딧불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신비로움이 되살아나곤 한다. 서울에 납품을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어디서라도 마음 놓고 깊은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가슴속 깊은 곳까지 파고드는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중력감을 잊곤 한다. 중국산 섬유제품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면서 섬유업계는 불경기에 허덕이고 있지만 장영덕 씨는 내산리를 떠날 생각이 추호도 없다. 서울 사람의 눈에 비친 내산리는 꿈에 그리던 제2의 고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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