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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호 동회장님의 선현지킨 한평생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A04030002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유지영

공암 입구에서 서원마을로 약 50미터 들어가면 마을의 산 증인 서인호 씨 댁이 나온다. 서인호(남, 82세) 씨는 마을에서 가장 연세가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대한민국 수립 이후 첫 행정사무가 시작되면서부터 마을의 대표자로 지금까지 마을과 함께 하고 있다.

서인호 씨 댁의 대문은 현재 검은 철 대문으로, 대문 바로 밖에는 서인호 씨의 유일한 농토가 자리한다. 그는 이곳에 봄에는 모를 심어 가을에 쌀을 수확하고, 쌀을 수확한 후에는 마늘을 심어 봄에 수확하는 1년 2모작을 한다. 작은 땅이지만 빈 터 인적 없이 쉼 없게 작물들이 자라는 풍경은 마치 서인호 씨의 전적과도 같이 부지런하다.

서인호 씨의 나이는 올해(2007)로 82세, 1926년에 이곳에서 태어났다. 그는 현재 공암리의 동회장이요, 공주향교 장의요, 충현서원 이사 및 종친회 고문을 역임 중에 있는 인물로 마을제사나 큰 제례 행사가 있을 때면 멋진 글씨로 축문과 제문을 써 내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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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호 씨의 글씨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가 3칸에서 지붕만 기와로 개량하였다고 해도 좋을 만큼 작은 옛집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모습은 그의 명예와는 사뭇 달라 보여 왠지 모를 궁금증이 생긴다. 그의 모습에서 공암리의 옛날을 짚어볼 수 있을까 하는 바람으로 댁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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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호 씨의 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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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를 베는 서인호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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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호씨 댁 마당

서인호 씨는 현재 살고 있는 집에서 태어나 일제치하에 공암 반포초등학교를 나왔다. 제19회로 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근처에 중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은 사라진 사곡(공주시 사곡면) 부근의 고지 중학교를 다녔다. 당시에는 중학교라고 불리었지만 중학교 마다 수업년한이 다르고 교육과정도 약간씩 차이가 있었다. 그때의 중학교가 지금의 중·고등학교를 합친 교육과정이었다고 생각하면 그는 당시 고등학교까지의 교육을 받은 셈이다. 먼 시골의 농사꾼 아들로 태어난 그가 고등학교까지 졸업했다는 것은 당시에는 대단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 후 52년도에 군대에 가서 5년 3개월간의 복역기간을 거쳤다. 제대 후에는 현재의 아내와 결혼을 하였으며, 8남매를 낳았으나 4남매를 잃고 아들 둘, 딸 둘을 키워냈다. 주업은 벼농사로 얼마 되지 않는 농사의 수익금으로 아이들을 고등학교까지 보내기가 무척 어려웠다고 회고한다.

충현서원 이 있어 그 후손들의 자부심이 대단했고, 그로 인하여 훌륭한 자손을 더 내야 겠다는 교육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였음에도 농사수익금만으로 교육을 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인지 마을에는 중·고등 교육을 받지 못하고 초등학교만 나온 사람들도 꽤 된다.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한 지금은 이곳에서 공주와 대전 가기가 무척 용이하지만 과거 이곳은 중·고등학교를 보내는 것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할 만큼 오지여서 공주사범학교 학생들이 와서 야학을 하기도 했던 장소이다.

때문에 당시의 서인호 씨 자녀들은 중·고등학교를 다니기 위해 새벽 4시에 일어나서 학교에 가고 한밤중에 돌아오는 긴 통학거리를 걸어 다녔다.

서인호 씨는 그리 넓지 않은 농토를 가졌음에도 돈이 많이 필요하던 장년기에는 농사 말고도 춘추 제향 때의 제사의례 등의 보임을 하여 받는 부수익금이 보탬이 되어 가사를 그럭저럭 운영해 갈 수 있었다고 한다.

아닌게 하니라 그의 과거 경력은 화려한데, 몇 가지만 꼽아보아도 이장 10년, 초등학교 기성 회장·육성 회장 등을 15년, 60-70년대 당시 한 정당의 반포면관리장을 10여년, 충현서원 상무이사, 현 이사 등 충현서원에서의 이력이 20여년, 공주향교 장의 19년, 이천서씨 소종중·대종중 회장 약 26년, 현 고문으로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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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호 씨

이야기 도중에는 자신과 자식들이 공부하던 때의 학구열이 대단했다는 것과 마을에서 하는 각종 제사가 충현서원 등의 제를 본받아 얼마나 격식 있게 치러지고 정결한지를 다시 한 번 강조하였다. 마을에 대한 애착심과 자긍심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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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제에 참석하고 있는 서인호 씨

현재 그는 자식들을 모두 대전으로 시집·분가시킨 상태이다. 농사를 이어갈 것이 아니라면 새로운 직장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헤어져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농사일을 접고 고향을 떠나 자식과 함께 살 생각이 없다. 어린시절부터 늘 그랬듯이 공암에서 충현서원과 선조의 유허를 돌보는 것이 유일한 그의 바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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