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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청 서기 현양사업 및 고청 유허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A01020005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유지영

[고청서기 현양사업]

고청 서기는 생전에 관직에 나아가거나 이름이 크게 떨쳐지지는 못했지만 그의 기이한 재주와 명철한 예견력, 교유인물, 문인, 후손들의 노력으로 사후 추증 및 증시의 은전을 받았다.

우선 그의 증직(贈職)은 시호를 받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일로서 융희 4년(1910)에 정2품인 ‘자헌대부규장각제학(資憲大夫奎章閣提學)’으로 증직되었다. 이 후 같은 달 ‘문목(文穆)’의 시호가 내려졌다. 시호는 정2품 이상의 품계를 받은 자 만이 그 시혜의 대상자가 될 수 있는 것으로서 쉽게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고청 선생의 정2품 증직 시에는 그의 사대(四代) 및 부인도 함께 추증되어 부인은 정부인(貞夫人)이 되었으며, 부모와 조부모·증조부모도 그에 준하여 추증되었다.

정2품의 자격이 갖추어지자 1914년에는 송병화(宋炳華)[1852-1916]가 비문을 지어 신도비를 건립하였다. 신도비 또한 정2품 이상 자 만이 그의 행적을 높이 기록할 수 있도록 법제화 되어 있기 때문에 영화로운 석물로 여겨졌다. 신도비의 비문은 보통 교유했던 문인들이 짓는 것이 관례이다.

이러한 일련의 추숭은 1925년 고종 때 훼철되었던 충현서원 사당 중건시에 고청서기를 별사의 형식이 아닌 정식 배향을 하는 것으로 이어졌고, 1935년에는 그의 묘지 앞에 세운 묘갈명이 오래되자 임간재(任艮宰)에게 글을 부탁하여 묘갈명을 새로 세웠다.

그가 처음 공암에 정착하여 강론을 했던 연정(蓮亭)은 그의 유허지로 수리·보존 중에 있으며, 1987년에는 연정 앞에 ‘문목공 고청 서선생 유허비’를 세워 그 자리를 기리고 있다.

또한 이천서씨는 그의 재실 겸 문중 재실로 쓰던 낡은 고청재실을 1999년 새로 완공하여 재실 본당을 ‘고청재(孤靑齋)’라 이름하여 확장하였다.

이상의 현향 사업들은 지역에서 그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예일 뿐만 아니라 이천서씨의 선조에 대한 자부심의 표현으로 서기에 대한 추숭은 현재까지도 멈춰지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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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청 서기 증직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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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서기 시호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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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탑 상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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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서씨 재실 고청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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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청재 주련에 새겨진 서기의 시

[고청 유허지]

고청의 거주 흔적이 남아있는 고청 유허지는 공암 이천서씨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천서씨에게는 중요한 유적이기에 후손들의 손길로 각별히 정돈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고청이 남긴 유적 및 유허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거북골 유지(龜谷 遺址)〉

거북골 유지는 고청 서기 선생이 지리산에서 공암으로 정착하기 직전 살던 곳이다. 계룡산의 북쪽 현재 온천리(溫泉里) 자리인 구곡(龜谷)에 와서 자신을 구당(龜堂)이라 칭하며 살았는데 이곳에서 학문을 연구하였다고 한다. 고청 사후 158년 뒤인 1749년에 홍계희(洪啓禧)가 충청도관찰사로 재직할 때 제작한 ‘고청서선생유지(孤靑徐先生遺址)’라는 각자(刻字)가 현재 온천리 계룡산 북쪽 진주봉(眞珠峰) 아래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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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골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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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청 서선생 유지 각자

〈연정(蓮亭)과 유허비〉

연정 은 고청 서기가 처음 공암에 정착 한 후 세운 강학터이다. 학문탐구와 제자 양성을 위해 연지(蓮池)와 맞닿은 자리에 맨 처음 연정(蓮亭)을 세워 활동을 하다가 찾아오는 학생들이 많아지자 조금 더 확장하여 그 자리에 박약재(博約齋)를 세우고 학생들의 배움의 공간을 위해 진수재(進修齋)와 천리재(踐履齋)도 세웠다고한다. 이렇게 시작한 강학소는 이후 조금 더 서남쪽 자리로 확장 이전하여 공암정사가 되었고 이것이 다시 공암서원→충현서원으로 발전하게 된다.

박약재(연정) 뒤 쪽 둠배산에는 서기 사후 19년인 1610년 공암서원 중수시 박희성의 아들 박고(朴卨+木)가 제작했다는 ‘고청 서선생 유허(孤靑徐先生遺墟)’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이 둠배산 아래에 연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이런 역사가 있기에 맨 처음 고청에 의해 강학터로 설립된 연정은 아직까지도 마을에 살고 있는 이천서씨(利川徐氏) 후손들에 의해 그 자리에 보존 중수되어 전해져 오고 있다. 이곳의 삼문은 1960년대에 새로 세운 것이다.

또 1987년에는 연정 바로 옆에 ‘문목공 고청 서선생 유허비’(충청남도 유림회장 김대영(金大泳) 撰, 성균관장 박중훈 書)를 세워 그의 유허를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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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청 서기 유허비

〈공암굴〉

공암에 들어서는 남쪽 마을 입구 산 밑에는 공암굴이 있고 그 공암굴 앞에는 안내문이 하나 있다. 이 안내문에는 이곳이 ‘고청 서기선생이 공암에 정착해 연정이라는 서당을 열고 후학 양성에 힘쓰며, 한여름이면 더위를 피하여 이 동굴에서 제자들을 가르쳐, 일명 서고청굴이라고 불러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이곳이 고청서기의 강학터 중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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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암굴

〈묘소 및 묘갈명〉

공암마을 남서쪽에 자리한 고청봉의 남쪽 기슭에는 고청 서기의 묘소가 정부인(貞夫人) 영천이씨(永川李氏)의 묘와 함께 유좌원(酉坐原)으로 모셔져 있다. 이 분묘를 중심으로 아래에는 이천서씨의 묘소도 함께 남아있어 이천서씨 선산을 이루는데 선산의 중간에는 고청 분묘의 사면 경계를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신설묘 금지구역 고시(新設墓禁止區域告示)’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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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청 선생 묘소 표시석

묘역의 좌우에는 한 쌍의 석주와 한 쌍의 문인석이 세워져 있으며, 두 분묘의 중앙에 신(新)·구(舊) 두개의 묘비, 부인 묘의 동쪽에 신·구 두개의 묘갈명이 세워져 있다. 그 중 중앙에 오래된 원래의 묘비는 1775년(영조 51)에 건립된 것으로 비문은 친구인 박지화(朴枝華)가 짓고 묘지(墓誌)는 조헌(趙憲)이 지었으며, 행장은 5대손인 행원(行遠)과 충청감사 홍계희의 주선으로 윤봉구(尹鳳九)가 지었다. 새로운 것은 묘갈이 오래되자 1935년 임간재(任艮宰)에게 글을 부탁하여 새롭게 세운 것으로 1775년 묘갈 앞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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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청 서기 묘비

또 묘소 우측에는 처음에 세웠던 묘비가 있는데, 비문에는 ‘고청거사서공기지묘(孤靑居士徐公起之墓)’라 새겨 있어 그가 사후 직후에는 ‘거사(居士)’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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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청 서기 묘비

묘 우측에 있는 또 한 기는 묘갈명이 낙후되는 것을 안타까워 한 후손들이 최근에 세운 묘갈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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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청서기 묘갈

〈신도비〉

고청 서기의 묘소 근처 산골짜기를 따라 약 50미터를 내려오면 고청 서기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이 신도비는 1910년 문목(文穆)이라는 시호가 내려짐에 따라 1914년에 건립된 것으로 송병화(宋炳華)[1852-1916]가 비문을 지었다. 전면 우측에는 ‘증규장각제학시문목공고청서선생신도비명(贈奎章閣提學諡文穆公孤靑徐先生神道碑銘)’이라고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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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청서기 신도비

이용자 의견
박** 제 컴퓨터가 낡아서인지 모르지만 어찌된 일인지 사진이 보이지 않네요. 소리도 안나고요.
  • 답변
  • 디지털공주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비스 시스템 자체에는 이상이 없으니 다시 한번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3.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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