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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서씨의 중시조 '고청서기'의 공암정착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A01020001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임선빈

공암은 이천서씨의 동족마을이다. 이천서씨 중에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인물은 고청(孤靑) 서기(徐起)[1523-1591]이다. 그는 충청우도 남포현(藍浦縣) 제석동(帝錫洞)에서 태어나 노년에 공암에 정착한 인물로 한미한 출신의 한계를 딛고 일어나 당시 신분사회의 질곡 속에서도 개인적 역량으로 한 시대에 기록될 만한 학문적 성과를 이룩한 사람이다.

서기가 공주 공암에 와서 살기 시작한 것은 50세 전후의 시기였다. 그의 정착 계기는 분명치 않은데 서기의 5세 손인 서행원의 기록에서는 ‘사양당 심충겸이 충청감사가 되어 우연히 계룡산 고청봉 아래 공암동에 좋은 터를 얻어서 서기를 불렀다’고 적고 있다.

공주 공암에 살고 있던 서기의 노년기는 이전보다는 비교적 안정된 시기였고 후학의 양성도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서기가 공암에 와서 처음 살던 곳은 고청봉 아래의 공암이 아니라 온천리의 거북골[龜谷]이다. 이곳에 집을 지어 구당(龜堂)이라 하면서, 그의 호도 종전의 이와(頤窩) 대신에 주로 ‘구당’이라 불리우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구곡에서의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고, 바로 충현서원이 세워지는 고청봉 아래의 공암으로 거주지를 옮겼는데 그 이후에는 고청초로(孤靑樵老)·고청선생(孤靑先生)으로 불리웠다.

그가 69세에 죽을 때까지 공암 생활 기간에는 왕성한 강학활동(講學活動)이 이루어졌다. 명성도 인근에 널리 알려져 공주를 비롯한 여러 고을에서 제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이 제자들의 주선과 고을 수령의 자금으로 서당과 연구실을 겸한 공암정사가 세워지게 되었다. 당시 그의 학문과 인품은 공주의 제독관(提督官)으로 온 조헌의 상소문을 통해 조정에까지 알려졌고, 조정에서는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과 함께 그의 등용문제를 거론하기까지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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