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분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2632
한자 -農旗
영어의미역 The Flag Which Takes Office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집필자 이걸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농기
재질 대나무|천
용도 두레 및 마을의 상징

[정의]

충청남도 공주에서 전해 내려오는 품격을 매긴 두레 농기.

[개설]

공주 지역에서는 두레 및 마을의 상징인 농기(農旗)에도 품격과 벼슬이 있었다. 이 말은 이웃마을의 농기에 대해 상대적으로 서열이 있다는 것인데, 공주 지역에서 일원적으로 서열을 정하는 순서를 보면 첫째가 청룡이나 황룡 또는 쌍룡이 그려진 용담기(龍膽旗)로서 몇 개 공동체 마을을 대표하는 농기이며, 둘째는 신농기(神農旗)로서 ‘신농유업(神農遺業)’이라 쓰고 두 개 이상의 두레를 가지고 있는 마을로 덕망 있는 학자나 서당이 있는 마을에서 세울 수 있으며, 셋째는 대본기(大本旗)라 불리며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쓴 가장 흔한 농기다.

무속적이거나 기타의 사유로 만들어진 농기는 서열에서 열외로 취급당하는 경향이 강하며, 서열이 같은 농기는 두레의 생성 연대, 규모와 양반의 유무, 두레 풍물잽이들의 실력과 규모, 영기와 부속기의 존재 유무 등의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정해진다. ‘벼슬한 농기’라는 것은 현지 벼슬아치의 관인이나 수결·문장이 더해진 농기로서 벼슬한 농기의 서열은 서명한 관료의 고하에서 비례하며, 농기가 벼슬을 얻고 나면 일반적인 농기의 서열에 관계없이 높은 위치를 차지한다.

[연원 및 변천]

공주 지역의 농촌에 구성되었던 두레는 대부분 농기를 세웠다. 농기에는 용담기·신농기·대본기·동작서성기·신농령기 등이 있었다. 용담기가 가장 위이며 신농령기가 가장 아래였기 때문에 용담기는 모든 농기에게 절을 받고, 신농령기는 모든 농기에게 절을 해야 하는 관계이다. 농기의 상하는 곧 두레의 상하로 연결되어 형님 두레, 아우 두레, 어른 두레, 아이 두레 등으로 구분되어 아래 두레는 윗두레에 지켜야 하는 예의가 많았다.

이러한 서열은 몇 가지 이유에서 바뀌기도 한다. 두레가 속한 마을에서 심각한 패륜, 즉 근친상간이나 친부모 살해 사건 등이 발생하면 농기의 품격과 관계없이 하위 농기로 전락한다. 또 다른 이유는 ‘벼슬한 농기’ 때문이다. 이는 두레가 사회에 끼친 공헌을 칭송하는 글을 농기에 기록하고 벼슬아치가 자신의 직을 쓰고 수결하는 것인데 하위 농기일지라도 수결을 받은 농기는 상위 농기가 되어 인근 농기 위에 군림하게 된다.

공주시에 존재했던 벼슬한 농기는 계룡면 하대리의 영의정 농기, 정안면 석송리의 한성판윤 농기, 의당면 송학리 몸티 판관 농기가 있으며, 해방 후 수결을 받은 농기로 신풍면 선학리의 충청남도지사의 수결 농기가 있었다.

[형태]

1. 영의정 농기

공주시 계룡면 하대리 마두들 두레 농기다. 본디 농기는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적힌 대본기였으나 조선 말기 삼남의 민심을 알아보기 위해 내려가던 한 영의정이 계룡면 하대리 정씨 문중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융숭한 대접을 받자 이에 대한 보답으로 농기에 수결을 하였다.

영의정 농기로 인하여 하대리중장리 내에 12개 두레가 연합 두레를 형성하고 공동으로 여름두레를 먹었으며 열두대징이 풍장놀이라는 독특한 민속을 형성하였다. 이는 11개 두레 농기가 영의정 농기에게 백중날 농기세배(農旗歲拜)를 올리는 절차로 인하여 생성되었다. 영의정 농기는 1960년대 후반까지 존재하였으나 새마을 운동 당시 소실되었다.

2. 한성판윤 농기

공주시 정안면 석송리 석송 본동 두레 농기다. 본디 농기는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적힌 대본기였으나 조선 말기 석송마을에서 군부대신을 배출하였고, 군부대신과 관련하여 석송리에 내려왔던 한성판윤이 본동 두레 농기에 수결을 하였다. 한성판윤 농기로 인해 인근 마을 두레 즉 석계두레, 북계두레, 삼바실두레, 모란두레, 전평두레가 일시에 하위두레가 되어 예의를 갖추게 되었다. 날짜를 정하여 농기 세배를 하지는 않았으나 들에서 만나면 예의를 갖추는 관계였다.

3. 몸티 판관 농기

공주시 의당면 송학리 몸티 두레 농기다. 본디 농기는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적힌 대본기였으나 조선 말기 판서의 수결을 받았다. 몸티 판관 농기에 대하여는 구전이라도 유래가 전하는 바가 없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몸티에서는 이 농기의 수결 부분을 소중히 여겨 농기를 새로 만들 때 수결 받은 부분을 바느질로 덧대어 사용하였다. 2007년 공주의 전통마을지 발간을 위한 마을 역사 조사 시 발견되어 지금도 송학리 몸티 창고에 보관되어 있으나 글씨가 퇴색되어 전문은 알지 못한다.

4. 충청남도지사 농기

공주시 신풍면 선학리 농기로 현재는 공주 선학리 지게놀이 보존회 농기다. 본디 청룡과 황룡이 그려진 용담기였는데, 2002년 전국민속예술제에 공주 선학리 지게놀이가 충청남도 대표 임속으로 출연하면서 충청남도지사 방문 시 수결을 받았다. 이 밖에도 우성면 상서리 본동 두레에 홍도사 농기 등의 벼슬한 농기가 있었다 하나 구체적 자료는 전하지 않는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