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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민유고』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2522
한자 石民遺稿
영어의미역 Posthumous Works of Seokmin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문헌/단행본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백원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집
관련인물 송달수(宋達洙)[1808~1858]|민규호(閔奎鎬)[1836~1878]
저자 남대식(南大植)[1823~1876]
편자 임창순(任昌淳)[1914~1999]
번역자 허경진(許敬震)
간행자 남혁균(南혁均)
저술연도/일시 1876년(고종 13)연표보기
편찬연도/일시 1930년연표보기
간행연도/일시 2002년 5월연표보기
권수 5권
책수 1책
사용활자 컴퓨터 조판
가로 19㎝
세로 26㎝
표제 石民遺稿
간행처 고성남씨 직제학공8세손 치단공파종중
소장처 공주대학교도서관
소장처 주소 충청남도 공주시 신관동 산 8 지도보기

[정의]

조선 후기 충청남도 공주에서 세거하였던 남대식의 문집.

[개설]

남대식(南大植)[1823~1876]은 세종조 집현전 학사로서 명성이 있던 남수문(南秀文)[1408~1443]의 13세손이다. 고성남씨가 옛 공주목의 관할 지역이었던 대전에 자리 잡게 된 것은, 연산군 때의 사화를 피하여 조광조의 제자였던 남신(南信)[1494~1557] 등이 벼슬을 버리고, 보문산 자락인 대전광역시 중구 석교동에 정착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장예원판결사를 지낸 남분붕(南奮鵬)[1605~1674]이 이곳에 봉소루(鳳巢樓)를 짓고 학문을 권장하며 인재를 길렀으므로, 가학(家學)이 전수되어 조선 말기까지 이어졌던 바, 곧 남대식과 남제철(南濟轍)[1835~1907] 등이 여기서 배출되어 시문(詩文)으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남대식의 자는 성유(聖有), 호는 석민(石民)이다. 약관에 송시열의 8세손인 송달수(宋達洙)에게 배웠는데, 50일 만에 『주자대전(朱子大全)』을 모두 암송하고, 해석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1872년(고종 9) 충청우도의 생원향시에서 장원하였고, 1873년(고종 10) 회시에 3등으로 급제하였다.

[편찬/발간경위]

1876년(고종 13) 남대식이 작고한 뒤 남희복(南熙復)은 남대식의 유고를 초고 상태로 보관하고 있다가 옥천으로 이주하였는데, 마침 이웃에 임창순(任昌淳)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때 임창순은 불과 15세의 소년이었으나 일찍이 한학을 배워 문장과 서예에 이미 상당한 수준을 갖추고 있었다.

이에 남희복은 보관 중이던 초고의 편집을 임창순에게 맡겼다. 1930년 임창순은 남대식의 시를 4권으로, 문은 1권으로 편집, 직접 필사하여 건곤(乾坤) 2책으로 엮어 장정하고 『석민유고(石民遺稿)』라 표제를 붙였다. 이후 남대식의 증손자 남용석(南容石)이 필사본 『석민유고』의 한글 번역을 허경진에게 맡겼으며, 이에 2002년 5월 1책으로 된 번역본 『석민유고』가 발간되었다.

[서지적 상황]

남대식의 시 중 일부인 175수를 필사한 『석민시(石民詩)』1책이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형태]

『석민유고』는 5권 1책이며, 가로는 19㎝이고, 세로는 26㎝이다.

[구성/내용]

권1~4는 모두 시이며 총 540수에 달한다. 형식으로는 칠언 율시가 대부분이며 칠언 절구가 약간 포함되었고, 그 밖에 고체시는 극히 적다. 내용은 당시의 문사들과의 교유시가 대부분인데, 남대식이 포의(布衣)의 한사(閒士)임에도 당대 뛰어난 서울의 문사들은 물론, 민규호(閔奎鎬)·민태호(閔台鎬)·김병국(金炳國)·김병학(金炳學)·조두순(趙斗淳) 등 당대 최고의 권문 세도가인 여흥민씨가와 안동김씨가의 고관대작들과 수창한 시가 많음은 매우 이례적이다.

권5에는 문 14편이 실려 있는 바, 여기에는 대제학 민태호의 요청으로 대작한 「단암민문충공치제문(丹岩閔文忠公致祭文)」과 제학 민규호를 대작한 「세자궁초도송(世子宮初度頌)」 등이 들어 있다. 이를 통해서도 당대의 문사들이 남대식의 문학적 역량을 높이 평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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