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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2091
한자 山亭里-路神祭
영어의미역 Sacrificial Rite for the Street of Sanjeong3-ri Soesil Village
분야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유형 의례/제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신풍면 산정리
집필자 조훈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노신제|당산제
의례시기/일시 음력 1월 1일~15일
의례장소 충청남도 공주시 신풍면 산정리 쇠실
신당/신체 느티나무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신풍면 산정리 쇠실에서 정월에 길일을 잡아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고자 지내는 마을 제사.

[개설]

산정리 쇠실에서는 마을 입구의 두 그루 느티나무에서 노신제를 지낸다. 주관은 마을회에서 하며 제일(祭日)은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 사이에 길일을 잡아 지내는데, 대개 정월 보름 전에는 제를 올린다. 하지만, 동네에 초상이 나거나 출산이 있는 경우는 부정이 있다 하여 보름을 넘겨 지내기도 한다. 사람은 물론 집의 가축이 죽어도 제는 연기가 된다.

쇠실에서는 특히 피 부정의 금기가 유독 강하다. 노신제를 앞두고 출산하는 것도 부정하게 생각한다. 쇠실은 피에 대한 부정 때문에 제물에도 돼지머리를 비롯한 고기를 올리지 않고 있다. 유사가 제물을 준비하고자 시장에 가도 머리를 들지 않고 땅을 보고 다닌다고 한다. 정육점 등을 지날 때 피를 보게 되면 부정을 타게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산정리신풍면 면사무소 소재지인 산정리에서 북쪽으로 2㎞ 떨어져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산정리 쇠실은 유독 금(金)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다. 금비둘기와 금돼지 전설이 그것인데, 다음과 같다.

1592년(선조 25)에 쇠실로 들어온 이지천(李志賤)은 마을에 매죽당이란 당을 짓고 학문을 닦았다고 한다. 그 후 손자 이서익이 죽은 뒤 매죽당 위에 묘를 썼는데, 그곳을 지나던 승려가 주인에게 말하길, “저 산소 때문에 이씨 집안에서 역적이 나올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후손은 놀라 서둘러 묘를 파 이장하고자 하였다.

이서익의 묘를 파자 거기에서 금두꺼비와 금비둘기가 나오더니 금두꺼비는 아래쪽 마을로 내려왔고, 금비둘기는 바리봉산으로 날아갔다고 한다. 그래서 후손은 바리봉산에 명당이 있을 것이라 여기고, 금비둘기가 앉은 바리봉산으로 묘를 이장했다. 그리고 원래 묘가 있는 자리는 산소를 쓰지 못하도록 사람을 시켜 인분을 붓도록 했다고 한다.

또, 1974년 한글학회에서 간행한 『한국지명총람(韓國地名總覽)』에는 쇠실 또는 금고라는 이름이 옛날에 집터를 닦을 때 쇠로 만든 돼지가 나왔기 때문에 유래한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마을에서는 땅속에서 쇠로 만든 돼지가 나왔다 하여 금곡(金谷)이라 불렀고, 이를 한글로 풀어 쇠실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산정리 쇠실에는 정주나무인 느티나무 말고도 2개의 서낭당이 있다고 전한다. 하나는 당산에 있고, 다른 하나는 쇠실 윗골에서 조평리의 실리와 둠벵이로 넘어가는 둠벵이고개에 있다고 한다. 마을 전체적으로 제를 올리지는 않지만, 개인적으로 섬기는 사람이 많으며, 특히 둠벵이고개의 서낭당은 수령이 오래된 벚나무로 마을 사람들은 이를 매우 신성하게 여긴다고 한다.

[연원 및 변천]

산정리 쇠실 노신제가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하였는지 문헌기록으로는 확인되지 않지만, 다만 제의 방법이나 금기 단속이 다른 마을의 것에 비해 까다로운 것을 볼 때, 그 연원을 현재의 마을 사람이 알 수 없을 만큼 아주 오래전부터 지냈다고 여겨진다.

[신당/신체의 형태]

쇠실 입구에는 수령 360여 년 정도 된 커다란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노신제를 지내는 날짜가 정해지면, 의례일 3일 전에 느티나무 주변에 소나무 울타리를 만들고 금줄을 친다.

[절차]

제관과 축관은 부정을 타지 않는 자로 신중하게 뽑았는데, 지금은 이장과 반장, 새마을 지도자 등의 마을 임원들이 제관이 된다. 보통 5~6명 정도가 제사를 주관하며, 초헌관은 항상 이장이 하는 것이 마을 관례라고 한다.

산정리 쇠실 노신제를 지내는 날짜가 정해지면 3일 전에 정주나무인 느티나무 주변에 소나무 울타리를 만들고 금줄을 치고 부정을 방지한다. 예전에는 일주일 전부터 울타리를 만들고 금줄을 쳤으나 지금은 3일로 줄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제시(祭時)도 길운(吉運)이 드는 시간을 따져서 정했는데, 지금은 밤 7시 정도에 지낸다고 한다. 노신제의 제관으로 선출되면 3일 전부터는 바깥출입을 삼가고, 심신(心身)을 정제하며 제를 준비한다. 과거에는 금기가 더 엄격해서 일주일 동안 집에서 목욕재계하고 바깥일을 보지 않았다고 한다.

제관으로 선출된 사람은 집 앞에 황토를 뿌리고 금줄을 쳐 부정 든 사람의 왕래를 막았다. 또 피를 보면 제를 올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특히 조심했는데 가시에 찔려 피가 나도 부정 탄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마을 제사가 끝날 때까지 산에 나무도 하러 가지 않았다고 한다.

제비는 해마다 가구별로 걷어서 충당한다. 예전에는 쌀과 돈을 걷었는데, 지금은 돈으로 걷는다. 각자 성의껏 내지만 보통 5천 원 이상은 낸다고 한다. 이때 걷은 돈은 제물과 마을 사람이 먹을 음식을 장만하고, 수렴한 돈은 남김없이 쓰는 것이 원칙이었다. 노신제에 필요한 여러 물품과 음식장만을 한 후 제비가 남으면 제관과 유사들에게 수고비 조로 담배나 수건 등으로 사례하기도 한다.

산정리 쇠실 노신제를 지내는 순서를 살펴보면, 먼저 제를 올리고 소지(燒紙)를 올린다. 소지는 대동 소지·이장 소지·각 호주 소지·개인 소지 순으로 올린다. 개인 소지는 멀리 나가 있는 자녀나 수험생이 있는 집에서 올리는 경우가 많은데, 소지비를 내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반드시 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예전에는 동네에 살다가 이사 간 사람까지도 소지를 올려주었으나, 지금은 외지로 나간 사람이 너무 많고 시간도 오래 걸려 생략한다.

제물은 떡과 삼색실과·포·술 등이다. 제물은 시장에서 가장 크고 좋은 것을 고르며, 물건을 살 때 흥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제사에 쓰이는 술은 과거에는 직접 담아 썼으나 지금은 시장에서 사다 쓴다.

제물은 고기를 일절 올리지 않고, 떡시루에 양초를 꽂지 않는 것도 특이하다. 떡 시루 안에 쌀 한 사발을 놓고, 그 위에 무를 파서 들기름을 붓고 심지를 만들어 불을 밝히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것이 어떤 연원이 있는지는 모르고 과거 제사 때부터 그렇게 전해져 지금도 그렇게 지낸다고 한다. 제사가 끝나면 마을 회관에 모여 음식을 나누어 먹는데, 제사를 지낸 제물을 먹으면 재수가 좋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조금씩이라도 나누어 먹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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