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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1670
한자 天主敎
영어의미역 Roman Catholicism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차기진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활동하고 있는 로마 가톨릭 교회.

[개설]

2005년 현재 가톨릭교회는 전 세계에 약 11억 명의 신도를 가진 최대의 공변된 교회이다. 2002년 현재 한국에는 420여 만여 명의 천주교 신자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천주교회의 교구 수는 서울·대구·광주의 3개 대교구를 포함하여 모두 14개이다. 본당은 765개이며 공소(公所)는 1578개이다. 성직자는 대주교 3명(한국인)과 주교 14명(외국인 3명 포함) 외 한국인 신부 1,298명에 외국인 신부 219명이다. 수도자는 수사(修士)가 한국인 288명에 외국인 32명이며, 수녀는 한국인 4,869명에 외국인 198명이다.

[변천]

공주에 천주교가 처음 전래된 시기는 1784년 말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부터였다. 당시 현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에 있었던 여사울의 이존창(李存昌)이 당시 공주 지역의 김명주(金明柱)·홍철(弘喆) 부자와 고윤득(高潤得)에게 천주교를 전하였으며 청양의 이도기(李道起)도 공주의 김선룡(金善龍)에게 천주교를 전하였다.

공주 지역에 천주교가 널리 확산된 것은 신유박해 이후부터 1866년의 병인박해 이전까지였다. 특히 1846년 11월 2일에는 프랑스 선교사 다블뤼(Daveluy, 安敦伊) 등이 현 충남 공주시 신풍면 봉갑리에 있었던 수리치골에서 성모성심회(聖母聖心會)라는 신심 단체를 설립하였다.

1850년대까지 현 신풍면 조평리에 있었던 둠벙이, 현 사곡면 신영리에 있었던 진밭, 현 반포면 국곡리에 있었던 국실, 현 신풍면 쌍대리에 있었던 먹방이, 현 정안면 고성리에 있었던 질울, 현 유구읍 녹천리에 있었던 관불 등지에 천주교도들의 은거지인 교우촌(敎友村)이 형성되었다. 그 중에서 둠벙이와 진밭 교우촌은 1861년 10월 신부가 상주하는 지역 신자 공동체 지역 본당(本堂)의 중심지로 결정되어 프랑스 선교사들이 거처하였다.

1866년의 병인박해 이후 공주 지역에서는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체포되어 처형되었으며 교우촌들은 대부분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1870년대 초에 이르러 박해가 종식된데 이어 1886년에는 한불조약의 체결로 신앙의 자유가 공식적으로 허용되었다. 이에 앞서 프랑스 선교사 두세(Doucet, 丁加彌)가 1881년부터 충청도 지역을 순회했으며, 1883~1884년에는 처음으로 공주 지역의 요골과 현 유구읍 명곡리에 있었던 서재의 교우촌을 본당보다 작은 신자 공동체인 공소(公所)로 결정하였다.

또한 두세가 공주읍으로 진출하여 공주공소를 결정한 시기는 1887~1888년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를 전후하여 공주 지역에는 요골공소·서재공소·공주공소를 비롯하여 현 신풍면 선학리에 있었던 버시니, 현 사곡면 구계리에 있었던 산막골, 사기점골, 현 유구읍 명곡리에 있었던 만악골, 현 정안면 내촌리에 있었던 안말, 운암산, 현 탄천면 운암리에 있었던 삼배실 등에서도 공소가 설립되었다.

한편 1890년 8월 두세가 현 서울 명동인 종현으로 전임됨에 따라 공주 지역의 공소들은 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의 양촌본당에 거처하던 선교사 퀴를리에(Curlier, 南一良)가 관할하게 되었다. 이후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날 때까지 공주 지역의 공소와 신자 수는 꾸준히 증가하여 8개 공소에 470명을 기록하였다. 이어 1895년에는 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공세리 본당이 설립되면서 공주 지역의 공소들은 양촌과 공세리 본당 관할로 구분되었다.

1897년 5월 8일에는 마침내 공주본당이 설립됨과 동시에 공세리본당에 재임하던 선교사 기낭(Guinnand, 陳普安)이 공주본당의 초대 신부로 임명되었다. 기낭 신부는 우선 유구의 요골공소를 거처로 정하고 현 공주시 중동인 공주읍 강경골의 새 부지를 매입한 후 같은 해 6월 28일 그곳으로 거처를 이전하였다.

그리고 1868년 4월 말에는 한옥 와가의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하였다. 당시 공주본당에서는 공주를 비롯하여 천안·서천·홍산·비인·부여·남포와 예산·서산·논산 일부 지역의 29개 공소와 신자 수 1,548명을 관할하였다.

[현황]

공주본당의 관할 구역은 설립 이후에 자주 변동되었다. 1901년 4월 27일에는 공주본당에서 현 부여군 구룡면 금사리의 금사리 본당이 분할되었다. 당시 공주본당의 신자 수는 1,891명을 기록하였으나 1901~1902년에는 1,437명으로 감소하였다. 그러나 1909~1910년에는 다시 28개 공소에 1,973명으로 증가하였다. 이후 공주본당은 1928년에 설립된 예산본당과 1939년에 설립된 천안본당으로 예산·천안·아산 지역의 일부 공소들을 이관하였다.

일제강점기에 공주본당은 많은 시련을 겪는 와중에서도 1921년 6월 제5대 본당 신부로 부임한 최종철(崔宗哲)이 1936년부터 고딕식 종탑을 갖춘 라틴 십자형의 새 성당과 사제관 공사를 시작하여 다음해 5월 12일에 완공하였다. 이것이 지금의 공주중동성당이다. 그러나 최종철 신부는 24년 5개월 동안 공주본당에 재임하다가 광복 이후인 1945년 11월 결핵으로 사망하였다. 한편 6·25전쟁 시에는 홍성본당의 강만수(姜晩秀) 신부가 공주에 잠입해서 몰래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대전 목동에서 처형되기도 하였다.

이후 1968년 12월 28일에는 공주본당에서 유구본당이 분리되었다. 이어 1982년 9월 7일에는 공주교동본당이 분리됨과 동시에 공주본당은 공주중동본당으로 개칭되었다. 1999년 1월 26일에는 공주중동본당과 공주교동본당에서 공주신관동본당이 분리되었다. 이로써 공주 지역의 천주교 본당은 모두 4개가 되었다.

한편 공주에는 1985년 현 공주시 금성동에 조성된 황새바위성지가 있다. 이 성지는 박해기의 천주교도 순교지이다. 1866년 이곳에서 처형된 손자선은 한국 103위 성인 가운데 한 명으로 1984년에 시성되었다. 황새바위성지공주교동성당 관할이었으나 2008년 1월 독립 성지로 되었다. 또한 1986년에는 박해기에 성모성심회가 설립되었던 신풍면수리치골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에 의해 성지로 개발되었으며 1990년 8월 22일에는 수도원 건물과 피정의 집이 완공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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