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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1550
한자 忠孝烈
영어의미역 Loyalty, Filial Piety and Fedelity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집필자 이해준

[정의]

충청남도 공주 지역의 충신과 효자와 열녀를 아울러 이르는 말.

[개설]

유교 도덕에서 기본이 되는 세 가지 강령인 삼강을 의미하는 충효열은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채택하였던 조선시대의 전 기간·전 지역에 걸쳐 강조되었던 매우 중요한 덕목이었다. 충신·효자·열녀를 최고의 도덕을 갖춘 인간으로 여기는 이와 같은 덕목은 당시 모든 사람들의 생활 전반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더 나아가서는 삶의 목표이자 기준 그 자체로 되기까지 하였다.

이런 현상은 조선시대의 지배 계급이자 학문을 이끌었던 양반 계층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들에게까지 강조되는 등 당시 사회 전반에 걸쳐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 또한 국가에서는 한글로 쓰여 진 삼강행실도나 관련 서적들을 일반 백성들이 읽을 수 있도록 장려하며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더욱 독려하였다.

충효열은 하나의 종합된 덕목으로 가치 면에서 차별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시대 배경에 따른 사회적 요구에 의하여 어떤 시대에는 충이 더 강조되고, 또 어떤 시대에는 효가 더 강조되는 등 약간의 차이도 있었다. 또한 충효열을 행한 인물들에게 내려지던 표창 정책 역시 시기별로 약간의 차이점들이 있었으나 대개는 관련 행적이 뛰어나 향중의 공론이 형성될 경우 정기 또는 부정기적으로 절차를 걸쳐 표창하고 그에 따른 특혜를 부여하는 식이었다.

즉 충효열 행적이 알려진 자는 그 행적 사실에 대한 인정 여부를 결정하는 해당 지역 사림들이 공론화 작업을 거쳐 수령·관찰사·어사 등에게 포장을 청하거나 바로 직소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 예조에서 현지 조사 후 정문·상직·복호·상물 등으로 포장을 결정하였다.

그렇게 내려지는 포장 가운데 가장 높은 단계가 정려였으며 충청남도 공주 지역에서도 정려 유적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남아 중요한 충효열 관련 유교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공주 지역에는 정려 유적 이외에도 고문서, 비석 등 기타 충효열 행적과 관련된 유적이나 유물들도 많이 전해지고 있다.

[사서의 충효열 인물 기록]

전통시대 중요한 유교 덕목으로 강조되었던 충효열은 역사서의 편찬 과정에서도 중요하게 페이지를 장식하기도 하였으며 포장의 과정을 보여주는 고문서 자료나 지역별 지리지·읍지 등의 인물 조에 많이 기록되기도 하였다.

공주 지역의 인물 중 최초로 알려진 충효열 인물은 효행과 관련된 인물인 효자 향덕으로 부모에 대한 효도와 불교적인 선행에 대한 미담 5항목을 수록하고 있는 『삼국유사』의 「효선」편에 기록되어 있다. 향덕은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중엽 인물로 우리 역사에서 문헌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는 최초의 효자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역사서인 『고려사』에서는 공주 지역의 충효열 인물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후 조선시대로 오면 기록들이 다양해지고 많아진다. 특히 조선시대의 경우 초기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충효열 인물에 대해 빠짐없이 기록하였으나 조선 중기·조선 후기로 갈수록 포상자들이 증가하면서 특별한 사례나 대표적인 인물들만 수록하였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특히 열녀의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1420년에 처음 공주목의 효행 인물이 기록된 이래 『순조실록』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기록되어 왔던 것으로 보인다.

[지리지나 읍지류의 충효열 인물 기록]

충효열 인물에 대한 기록은 지리지나 읍지류에서도 나타난다. 조선 전기 지리지의 집성편이라고 할 수 있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전의 지리지와는 달리 인물 조를 따로 편성하여 역사상 유명한 학자·고승·충신·무장·효자·열녀 등을 다루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공주목의 충효열 인물로 효자 4인과 열녀 3인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충청감영읍지』의 인물조에는 공주목의 충효열 인물로 충신 11인, 효자 16인, 효녀 1인, 열녀 13인, 효부 2인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공주 지역의 충효열 인물을 연구하는데 가장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는 읍지류인 『공산지』에는 공주 지역의 충효열 인물로 충훈 21명, 효자질 14인, 신증 효질 31인, 구지 절효녀 2인, 신구 열녀질 35인이 기록되어 있다.

그 외 『호서읍지』에는 공주 지역의 충효열 인물로 충신 11인, 충훈 21인, 효자질 구지 15인, 신증 효 31인, 구지 절효녀 2인, 신구 열녀질 35인이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편찬된 『조선환여승람』과 『공산지』의 공주군편에서도 공주 지역 인물들 중 충효열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조선환여승람』에서는 정려조가 따로 있어 15기의 정려도 소개되고 있다.

[기타 문서의 충효열 인물 기록]

공주 지역의 충효열 인물을 기록하고 있는 그 밖의 문서로는 『효행등제등록』과 『충효열등제등록』이 있다. 이 중 예조에서 1655년(효종 6)부터 1788년(정조 12)까지의 효행 등제 단자를 모아 엮은 『효행등제등록』에는 공주의 충효열 인물로 정려 20인, 복호 28인, 상물 15인, 증직 15인, 면천 3인, 제직 6인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20인의 정려 인물 중 최백복의 처 권씨를 제외하고는 현재 모두 정려가 남아있지 않다.

또한 1789년(정조 13)부터 1854년(철종 5)까지 충효열로 표창된 명단이 수록된 예조의 등록인 『충효열등제등록』에도 공주 지역의 충효열 인물 21인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충효열등제등록』에 등재되어 있는 정려 포장자 8명 중 유회원의 처 부령김씨를 제외하고는 현재 정려가 남아 있지 않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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