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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1070
한자 李喆榮
영어음역 Yi Cheolyoung
영어의미역 Yi Cheolyoung
이칭/별칭 계형(季衡),성암(醒菴)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상왕동 중동골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이춘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충청남도 공주시 상왕동 중동골
성별
생년 1867년연표보기
몰년 1919년연표보기
본관 경주(慶州)

[정의]

조선 말기 충청남도 공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계형(季衡), 호는 성암(醒菴)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의 9대손이다. 아버지는 이홍제(李弘濟), 어머니는 상산박씨(商山朴氏)로 통덕랑(通德郞) 박용원(朴龍遠)의 딸이다.

[활동사항]

1904년 일본 사람들이 철도 부설을 위하여 공주에 있는 선영(先塋)을 침범하자, 유림의 진정서를 갖고 관계자를 찾아가 항의하였다. 1905년 이유태의 『사서답문(四書答問)』을 교정 발간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기의려문(起義旅文)」을 지어 거사하려다 실패하였고, 1908년 돈암서원과 부여향교에서 신학문을 가르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편지로 부당함을 전하였다.

1909년 일본이 고종의 칙명이라며 국민의 호적을 만들려고 하자, 이에 반대하여 일본 정부에 그들의 간상을 낱낱이 지적한 장서를 보냈다 홍산경찰서에 이송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914년 부여 순사주재소에 잡혀가 70여 일간 구금되었고, 1918년 호적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시 부여 일경주재소에 잡혀갔다가 석방되었다. 또한 왜인들의 정령(政令)을 모두 거부하여 온갖 고초를 겪었고 산판(山坂)을 수탈당하기도 하였다. 1919년 향년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사상]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당시 고질적 폐단이 되어 온 성리 논쟁에 대하여 율곡 이이의 학설로 미루어 종합 절충론인 ‘사상강설(四上講說)’을 지어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성암집(醒菴集)』과 『내범요람(內範要覽)』, 옥중 일기인 『부풍일기(扶風日記)』가 있다.

[상훈과 추모]

충청남도 공주시 상왕동 중동골에 있는 숭의사(崇義祠)에 배향되었다. 숭의사는 1968년 공주향교의 전교 정인상 등 공주시 유림 51명이 전국 각지 향교와 서원에 이철영의 덕행과 행적을 기리기 위한 사우를 세우자는 통문을 돌려 건립되었다. 이에 전국의 18개 향교, 서원, 사우가 사우 건립에 찬동하는 답을 보내왔고 국비와 도비, 후손들의 기금을 모아 1971년 완공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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