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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0984
한자 抗日運動
영어의미역 Independence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진호

[정의]

일제강점기에서 해방 전까지 충청남도 공주 지역에서 전개되었던 독립 운동.

[개설]

일제는 1875년 강화도 침범을 계기로 조선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을 시작하여 1976년 강화도조약으로 향후 조선 지배를 위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후 일제의 조선 지배 야욕은 더욱 노골화되어 1910년 마침내 대한제국의 주권을 침탈함과 더불어 조선에 대한 직접적인 식민지 지배를 단행하면서 우리 민족을 속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 우리 민족은 일제 식민지하에서 민족의 자주 독립을 회복하기 위한 항일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하였다. 충청남도 공주 지역에서도 3·1운동, 청년 학생 운동, 노동 운동, 농민 운동, 비밀 결사 운동 등 민족 독립을 위한 활발한 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1910년대]

3·1운동 이후 공주 지역에서도 3월 7일 독립 만세 운동을 위한 첫 시도와 함께 3월 10일 독립 만세 운동을 위한 모임이 있었으며 3월 12일 마침내 독립 만세 운동이 실행에 옮겨졌다. 그러나 공주 지역에서의 본격적인 독립 만세 운동은 3월 14일 유구의 우시장에서 천도교도인 황병주의 주도하에 약 500여 명의 인사들이 고창한 독립 만세 운동이었다.

그리고 이 운동으로 황병주가 체포되자 이에 항거하여 주재소를 파괴하는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어 3월 17일에는 김희봉이 황병주 외 20여 명의 인사들이 공주경찰서로 연행된 것에 분개하여 공주 시장의 군중들에게 독립 만세를 권유함과 동시에 솔선하여 독립 만세를 외쳤다.

4월 1일에는 정안면 석송리이기한이 마을 주민들과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정안면소재지로 행진하였다. 도중에 웅궁리 주민 20여 명이 합세하여 독립 만세 운동의 기세는 더욱 고조되었으며 정안면소재지에 도착한 군중들은 주재소를 파괴하였다.

또한 석송리로 귀가하여 김원일의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인사들은 공주에서 출동한 일제 군경과 맞서 격투를 벌렸다. 이 과정에서 이상림이 순국하고 10여 명의 인사들이 중경상을 입었다. 뿐만 아니라 같은 날 공주시내에서는 영명학교의 김수철·김관회·이상규·유준석·노명우·양재순·윤봉균 등의 교사와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시장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외에도 장기면·의당면·계룡면·우성면·탄천면·경천면 등의 지역민들도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이 공주 지역에서는 3·1운동 이후로 3월 15일 전후한 3차례의 독립 만세 운동과 4월 1일에서 5일 사이에 집중적으로 전개한 독립 만세 운동에 연 인원 1만 명 이상이 참가하였다.

[1920년대]

3·1운동 이후 일제의 기만적인 문화정치 하에서 청년·유지를 중심으로 각종 수양 단체가 조직되어 농촌 계몽 운동 등과 같은 신문화 운동이 전개되었다. 1920년대에 혁신적인 청년들이 주도하여 공주청년회(1920년 7월), 공주소년동맹(1927년 3월), 신간회 공주지회(1927년 9월) 등의 사회 운동 단체를 조직하였다. 공주청년회(공주청년수양회)는 1921년 10월 노동 야학 강습회를 개설하여 야학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로 공주 지역에서 야학이 활성화되어 1929년까지 13개의 야학이 개설되었으며 43명의 교사가 모두 723명의 학생들을 가르쳤다. 또한 공주청년회는 지역민을 위한 연극공연이나 체육 활동도 전개하는 한편 충남고등보통학교 유치 문제 등과 같은 지역 민원 해결에도 적극적으로 활약하였다. 공주소년동맹공주청년회의 형제 단체로 회원 교양, 회보 발행, 반동단체 규제, 어린이의 날 행사, 조혼 폐지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그 활동이 점점 약화되었다.

학생 운동의 경우 주로 공주고등보통학교(현 공주고등학교)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4학년생이었던 이철하는 1927년 6월 한국인을 무시하는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의 민족적 차별에 대하여 반성과 각성을 촉구하는 서신을 교장에게 보냈다. 이로 인해 이철하가 일본인 선생들에 의한 구타·고문과 함께 퇴학당하자 동급생이 중심이 되어 동맹 휴교를 결의하고 6개조의 요구 사항을 제시하는 등 학생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4학년생 이관세는 1929년 12월 광주학생운동 시기에 동급생 윤상원과 2학년생 유종호 등과 함께 한국인 학생들을 결속하여 6일 동안이나 동맹 휴교를 주도하였다. 그리고 1932년 3월에는 김순태·노수남 등의 자퇴생들이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반제격문을 배포하는 격문 사건을 주도하였다.

노동·농민운동의 경우 1925년 8월 조선일보 조선지국이 노동협성회의 발기취지문을 작성하여 각 면에 알리고 조직화하고자 하였으나 준비위원회 사정으로 결성이 되지 못하였다. 이어 1926년 1월에도 준비위원회가 다시 활동을 개시하여 3월에 공산성 영은사에서 창립총회의 개최를 결의하였다. 그러나 일제 공주경찰서의 집회 불허 방침에 의해 창립총회는 무기한 연기되었다.

한편 1927년 3월 5일에는 일제 경찰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주외면 화은리의 황원숙이 마을 앞산에서 5-6백 명의 농민과 함께 노농협성회 창립대회의 개최를 주도하여 ‘소작상조, 노동공제, 무산교육, 애경상조’ 등의 강령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창립대회의 명칭과 관련한 일제의 시비로 인해 회의 명칭을 노동협성회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주외면의 창립대회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자 뒤를 이어 계룡면, 장기면, 우성면, 신하면에서도 노동협성회가 조직되었다.

[1930년대]

일제의 탄압으로 실질적인 활동과 성과를 보이지 못하였던 노동협성회의 농민운동은 1930년대 초반의 농업 공황 하에서 소작 쟁의로 이어졌다. 1931년 11월 주외면 신기리 한창훈의 집에서 소작인 120명이 신기리 소작인동맹을 조직하고 ‘소작권 이동 절대 반대, 소작료의 지주 4할 소작인 6할제 실행, 마름제 철폐’ 등을 결의하였다. 이어 계룡면중장리, 하대리, 구왕리내흥리에서도 소작인동맹이 결성되었다.

여기서 소작인들은 소작료 5할 이상은 거절할 것, 공과금 급 경종세 부담을 소작인에게 전가함에 불응할 것, 봄에 체결한 소작계약은 지주의 독단적 계약이니 이를 취소할 것, 소작료는 정식계약 체결 전에는 불납할 것, 토지 관리비 지불에 불응할 것, 타인의 소작권을 빼앗아 농사짓는 일을 하지 말 것, 두량은 평목으로 계산하고 근량은 백팔십 근으로 할 것, 10리 이상의 소작료 운반은 거절할 것, 금비 사용을 폐지하고 퇴비를 사용할 것 등 9개항의 결의를 채택하여 읍내 거주 20여 명의 지주에게 전달하였다. 이에 당시 일제 군수는 소작쟁의의 확산을 막기 위하여 읍내 지주들을 조치하여 타합을 종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의당면 수촌리의 소작인 100명도 임성문의 집에 모여 공주군 농회장과 경찰서장에게 소작료 4할, 공과금 지주 부담 등을 요구하면서 소작료 불납동맹을 결의하였다. 이와 같은 소작 문제는 1932년에도 이어져 5월에는 우성면 보흥리방흥리 홍원표의 소작인 60명이 불수확동맹을 조직하였고, 홍원표의 마름 육진승의 소작권 무단 이동과 두렁세 징수 등과 같은 횡포에 반발하여 쟁의를 일으켰다. 1934년 4월에는 공주향교 소유 토지에 대한 소작 쟁의도 발생하였다.

그리고 일제가 1920년대 산미 증식 계획의 일환으로 추진했던 수리조합 결성에 대해 우성면 지주들이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 우성면 한국인 지주들은 ‘투자에 비해 수익이 많지 않다는 점, 몽리구역 토지가 대체로 우량 답이라는 점, 금강이 범람하면 몽리구역 이외의 토지와 가옥 피해가 더 커질 것’ 등을 지적하였다. 신문들도 ‘일개 일본인 지주의 의견에 부합’하여 지주들을 군 당국이 강제로 명령 복종하게 한 것으로 논지를 전개하였다. 지주들은 이와 같은 진정 투쟁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자 3월부터 시위와 진정을 병행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비밀 결사 운동으로는 안병주 등의 적색비밀결사 활동을 들 수 있다. 일제 공주경찰서는 1932년 3·1운동 12주년을 기념하여 반제격문 수십 매가 공주고등보통학교와 영명학교 구내에 배포된 항일운동과 관련하여 3월 4일 새벽부터 대대적인 혁신 청년 운동가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안병두, 윤귀영, 하창순, 김정태, 박명렬, 이영근, 구자명, 이도원, 김순태, 노수남 등의 인사들이 강제로 연행을 당하였다. 일제는 이들에 대해 각종 고문·악형과 함께 적색비밀결사 사건으로 왜곡하여 치안 유지법 위반죄를 적용하였다. 특히 안병두는 1931년 10월 방흥리 소작인들의 소작 쟁의를 직접 지도하면서 농민들이 지주들의 착취에 항거하도록 고무하였으며 12월 6일에는 구자명과 함께 공진회를 조직하여 읍내 점원의 의식화 운동도 전개하였다.

그 외의 비밀 결사 운동으로는 이용하 등이 주도한 적색독서회 활동이 있다. 일제는 1933년 3월 4일 이용하를 비롯한 청년 11명을 공주경찰서에 강제로 연행하여 취조함과 더불어 사건을 확대시켜 공주 지역뿐만 아니라 연기, 부여, 논산 등지의 청년 20여 명도 체포하였다.

또한 수사대를 경성으로 파견하여 공주청년회의 간부였던 정용산도 체포하였다. 그리고 이어진 경성복심법원의 복심 공판에서 적색독서회 조직에 대한 치안 유지법 위반 혐의가 적용되어 이용하는 징역 2년을, 이수준과 윤재명은 징역 1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3.10.31 관련시청각 연결 GC017P2955, GC017P2956, GC017P2957, GC017P2958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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