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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0868
한자 武寧王
영어음역 Muryeongwang
영어의미역 King Muryong
이칭/별칭 사마,도군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왕족·호족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
집필자 서정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출신지 일본 큐슈[九州]
성별
생년 461년연표보기
몰년 523년연표보기

[정의]

삼국시대 백제 제25대 왕.

[가계]

무령왕의 가계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기록들이 남아 있다. 먼저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무령왕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의 내용으로 볼 때 무령왕동성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무령왕은 461년에 태어났는데, 동성왕은 적어도 464년 이후에나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도 무령왕의 탄생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역시 두 가지로 기록되어 있다. 하나는 개로왕의 아들이라는 기록이고, 다른 하나는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昆支)의 아들이라는 설명이다. 아울러 무령왕동성왕의 배다른 형으로 기록하고 있다.

여러 문헌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의 내용으로 보아 무령왕동성왕보다 적어도 3살 이상 많은 형일 가능성이 높은 만큼 무령왕동성왕의 배다른 형일 가능성이 높다. 마찬가지로 무령왕개로왕의 아들이기 보다는 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활동사항]

무령왕(武寧王)[재위 501~523]의 이름은 사마(斯麻, 斯摩) 또는 융(隆)이라 하였다. 키가 8척이나 되고 얼굴은 그림 같았으며 성정이 인자하고 너그러워 민심이 많이 따랐다. 무령왕백가(苩加)가 보낸 자객에 의해 동성왕이 죽자 뒤를 이어 40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갑작스럽게 왕위에 오른 무령왕동성왕의 피살에 따른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고 왕권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으며, 피폐해진 경제를 회복하고 지방 통치를 강화하는 한편 국제적 지위를 다시 회복해야만 했다. 실제로 무령왕은 이를 위해 몇 가지 주요한 조치를 취하였다.

먼저, 무령왕은 즉위하자마자 백가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백가는 자신을 가림성(加林城)으로 내보낸데 불만을 품고 동성왕을 시해한 인물이다. 그러한 백가가 가림성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킴에 따라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동하여 쉽사리 진압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동성왕의 피살에 따른 혼란이 종식되고, 동성왕 대에 지나치게 비대해진 신진 귀족 세력들을 일정하게 억제하게 됨으로써 왕권을 새로이 안정시킬 수 있었다.

무령왕이 취한 두 번째 조치는 고구려와 말갈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항하는 것이었다. 무령왕은 즉위하던 해 11월에 달솔 우영(優永)을 보내 고구려의 수곡성(水谷城)을 습격하게 한 것을 필두로 502년(무령왕 2)에도 고구려의 변경을 공격하였고, 503년 말갈이 공격해오자 이를 손쉽게 물리쳤다. 507년 고구려의 고노(高老)가 말갈과 더불어 침입해오자 역시 물리쳤으며, 512년에도 쳐들어온 고구려 군대를 기묘한 계책으로 대파하였다.

이렇게 무령왕은 고구려에 대해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기도 하고, 반격해 오는 고구려와 말갈을 효과적으로 격퇴시키는 등 고구려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무령왕이 521년에 “여러 차례 고구려를 깨뜨려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선언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라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백제의 국제적인 지위도 격상되었다. 웅진 천도 후 백제는 중국과의 교류가 여의치 않았다. 교류를 시도하고자 하였으나 번번이 고구려에 의해 차단당했기 때문이다. 자연히 국제적인 지위도 하락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에 격파되어 한성이 함락된 이후 그야말로 계속해서 쇠약해지기만 했던 셈이다.

그런데 무령왕이 등장하면서 고구려에 대한 공세를 취하고, 마침내 고구려와 세력균형을 이루게 됨에 따라 국제적 지위도 격상되었다. 무령왕은 양나라와의 외교 관계도 강화하여 512년과 521년에 각각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521년에 양나라로부터 영동대장군이라는 작호를 받은 것은 격상된 백제의 국제적 지위를 대변해 주는 것이었다.

무령왕은 격상된 국제적 지위를 바탕으로 지방에 대한 통제력도 강화하였다. 한성 함락과 웅진 천도라는 전에 없었던 혼란기를 겪으면서 중앙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은 느슨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느슨해진 지방 통제력을 강화시킨 것이 담로제(擔魯制)였다. 담로란 군현(郡縣)과 같은 행정 단위로 왕족을 파견하여 통치하는 곳인데, 『양서(梁書)』에는 백제에 22개의 담로가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백제에서 22담로제가 실시된 것은 대체로 무령왕 때로 보고 있는데, 이는 무령왕 때에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느슨해진 것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에서 나온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무령왕은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고구려의 압력에 의해 웅진 천도를 단행함으로써 백제는 한강 유역을 상실하게 되었다. 무령왕은 이러한 영토 축소를 극복하기 위해 가야 지역으로의 진출을 적극적으로 도모하였다. 그 결과 상다리, 하다리, 사타, 모루, 기문(己汶), 대사(帶沙)를 차지하였다. 한강 유역 상실에 따르는 인적(人的)·물적(物的) 손실을 만회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셈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무령왕은 민생의 안정을 위해서도 전력을 기울였다. 506년(무령왕 6)에 백성들이 굶주리게 되자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으며, 510년에는 제방을 튼튼하게 쌓고 놀고먹는 자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도록 하였다. 수리 시설을 완비하고, 토지에서 이탈된 농민들이 다시 농사지울 수 있게 함으로써 피폐해진 농가 경제를 회복하고 국가 재정을 충실히 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무령왕은 웅진 천도에 따른 혼란을 종식시키고, 왕권을 안정시켰으며, 농민경제를 회복시키고, 고구려와의 경쟁에서도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등 백제 중흥의 길을 연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523년 5월 7일 62세의 나이로 서거하였으며, 525년 8월 12일 공주 송산리 고분군의 무령왕릉에 안장되었다.

[묘소]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송산리 고분군에 자리하고 있다. 송산리 고분군은 제일 동쪽에 1~4호분 등 4기의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 있고, 여기에서 계곡을 건넌 서쪽 편에 무령왕릉, 5호분, 6호분 등이 자리하고 있다. 1971년 7월 배수로 공사를 하다 우연히 발견된 무령왕릉무령왕과 왕비의 합장묘이고, 발견 당시 도굴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삼국시대 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무령왕의 신원이 확인된 왕릉이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관** 디지털공주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이용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3.06.17
비**** 좋은 동영상 감사합니다. 2013.06.16
t******** 감사합니다.무령왕에 대하여 자세히 알게되었어요^ㅁ^ 2011.06.07
q********* 위에분들 왜그러는지 알겠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11.06.07
w******* 완전 좋아요~!!!!!!!!!!!!!!!!!!!!!!!! 2011.05.30
w******* 완전 좋아욬ㅋㅋㅋㅋㅋㅋㅋㅋ!!!!!사랑해요~ㅋㅋ작성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작성자를 찬양합시닼ㅋㅋㅋㅋㅋㅋㅋㅋ. 2011.05.30
y******** 아주 좋아요! 최고!
짱!
킹이 되셨어요!
2011.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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