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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0490
한자 丙子胡亂
영어음역 Byeongjahoran
영어의미역 Manchu Invasion of 1636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경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전쟁
발생(시작)연도/일시 1636년 12월 2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637년 1월 30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압록강
관련인물/단체 김장생(金長生)[1548~1631]|김집(金集)[1574~1656]|정홍명(鄭弘溟)[1592~1650]|인조(仁祖)[재위 1623~1649]|태종(太宗)[재위 1626~1643]

[정의]

1636년(인조 14) 12월 2일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침략으로 발생한 전쟁.

[역사적 배경]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형제의 의’를 맺은 이후 조선은 후금(後金)과 무역뿐만 아니라 일정한 정도의 공물을 바쳐야만 했다. 그러나 후금은 만주의 대부분을 석권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명(明)의 북경 부근까지 공격하면서 정묘호란 때 맺은 ‘형제의 의’을 ‘군신의 의’로 고치자고 요청을 해올 뿐 아니라, 종전보다 무리한 공물과 병력 지원을 요구해왔다.

이러한 후금의 무리한 요구에 척화론(斥和論)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1636년 2월 인조비 한씨의 문상차 사신으로 온 후금의 용골대(龍骨大), 마부대(馬夫大) 등이 무리한 신하의 예를 강요하였다. 이에 후금과의 전쟁을 결심한 인조(仁祖)는 사신의 접견을 거절하고 국서를 받지 않았으며 후금 사신을 감시하게 했다.

조선의 동정이 심상하지 않음을 알아차린 용골대, 마부대 등은 도주했는데, 공교롭게도 도망치던 도중에 조선 조정에서 평안도관찰사에게 후금과의 전쟁에 대비할 것을 지시한 공문을 빼앗아 본국으로 가져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조선의 후금에 대한 태도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게 된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1636년 12월 2일 청 태종(太宗)이 직접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옴으로써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발하였다.

[경과]

병자호란 때도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는데, 공주 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 정홍명(鄭弘溟) 등 지역의 유림이 중심이 되어 활발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충청도와 전라도의 호소사로 임명된 김장생은 8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왕명을 받들어 각처에서 산발적으로 봉기하던 의병을 흡수하여 의병의 일관된 체제를 형성하는데 주력하였다.

김장생의 아들 김집도 전세가 다급하고 길이 막혀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호남 지방에 내려가서 의병을 모집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정홍명도 공주에서 의병들을 점검하여 전투에 임할만한 사람을 선발하기도 하였다.

[결과]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삼전도(三田渡)[현 서울 송파구 삼전동]에서 청의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례(降禮)를 함으로써 병자호란은 종결되었고 각처에서 궐기한 의병도 해산되었다. 전쟁의 조기 종결로 공주의 의병 활동이 큰 성과를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공주인이 보여주었던 자발적인 참여 의식은 소중한 문화적 유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2.03.23 오기 수정 1936년, 1937년을 1636년, 1637년으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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