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땅도 나이를 먹는다. 어떤 작물을 심어도 잘 되고 잘 자라는 젊은 땅이 있는가 하면 잘 자라지 않는 늙은 땅이 있다. 작물도 지력(地力)을 고갈시키는 작물이 있고, 지력 회복을 돕는 작물이 있다. 지력이 고갈된 땅은 휴경하거나 지력 회복을 돕는 작물을 심고, 퇴비나 비료를 넣어 지력을 상승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노력으로도 지력 회복이 어려우면 다른 곳의 흙을 가져와 땅의 성질을 바...
-
화양마을이 자리한 광활면의 주 생산 품목은 분명 쌀이다. 갯지렁이를 잡고, 조개를 캐고, 망둑어를 잡아 농가 수익에 도움이 되었지만 벼농사만큼 소득을 올리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현재 광활면은 쌀보다 하우스 감자로 더 유명하다. 주 생산 품목이 바뀐 것이다. 연간 소득도 쌀보다 감자가 높다고 한다. 광활면에서 봄에 생산하는 하우스 감자가 전국 생산량의 20%를...
-
고향을 떠나 다른 지역에 정착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강제적인 이주가 아닌 자발적인 이민의 경우 생존 경제와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 화양마을이 자리한 광활은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의 일환으로 광활방조제를 막으며 개발된 간척지이다. 염기(鹽氣)[소금기]가 가득한 갯땅을 전국에서 이민자들을 받아들여 염기를 제거하고 농사가 가능한 땅으로 만들었다. 해방 후 광활은 이민자들의...
-
화양마을에는 홀로 사는 할머니들이 많은데, 대다수가 농사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령이다. 이분들의 경제는 자녀가 보내 주는 돈이 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더러는 노령 연금이나 정부 지원금으로 충당하는 경우도 있다. 평소 생활은 집안에서 TV를 시청하거나 마을길을 산책하며, 집 근처에 위치한 텃밭을 가꾼다. 그리고 가끔 가까이 사는 친척집을 방문하기도 하고, 자녀의 집...
-
김제에서는 땅 넓이를 가리키는 단위로 1마지기가 150평[495.87㎡]이고, 8마지기는 1,200평[3,966.94㎡]으로 ‘1필지’ 또는 ‘1배미’라고 부른다. 광활은 하우스 감자의 성공으로 대부분의 땅에서 2모작 또는 3모작이 성행하고 있다. 그래서 겨울에도 노는 땅보다는 비닐하우스가 설치된 땅이 더 많다. 1년 동안 땅을 빌리는 세가 1,200평 기준으로 적게는...
-
1991년 새만금방조제 공사가 시작할 당시만 해도 화양마을 주민들은 자신들에게 농토가 생긴다 하여 공사를 반대하는 사람이 적었다고 한다. 갯벌에 나가 갯지렁이, 조개, 망둑어로 생계를 이어 가던 사람들은 보상을 받았다. 그러나 새만금방조제 공사가 진척이 되면서 화양마을 주민들은 더 이상 갯벌에 나갈 수 없게 되었다. “[어업] 보상 다 나왔죠. 끝나 버렸지. 애당초는 천만 원을 주...
-
화양마을 주민들의 생활은 방조제 안쪽 농토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논보다 방조제 너머 끝없이 펼쳐진 갯벌에 나가 짠 바닷물과 갯흙을 밟는 시간이 많았다. 쇠스랑처럼 생긴 기구를 이용하여 갯벌을 헤집고, 그물이나 낚시를 던져 걷어 올린 것은 짱뚝[방조제]을 거치면 생활이 되었고, 집으로 들어오면 생계가 되었다. 화양마을 주민에게 갯벌은 황금밭이 되고,...
-
인공위성이나 항공사진으로 화양마을이 위치한 광활면을 내려다보면 직사각형의 논들이 반듯하게 정렬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정렬된 논에는 계절에 따라 녹색의 벼가 차기도 하고, 하얀 비닐하우스가 가득 들어서기도 한다. 광활의 들판은 대개 쌀과 하우스 감자로 2모작을 주로 하지만, 사이 작물로 쑥갓이나 양상추를 재배하여 3모작을 하는 농가도 있다. 1980년대 이전에는 쌀과 보리...
-
1980년대 감자 농사의 성공으로 화양마을을 포함한 광활면으로 수많은 젊은 사람들이 이주하였다. 이들은 현지 주민들과 직간접적인 관계를 가진 사람이 대부분이어서 정착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고 한다. 광활면에서 30년 가까이 살다 보니 지금은 나이가 50~60대로 면과 마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주요 임직을 차지하고 있다. “여기는 본래 있던 토백이들은 별로 없어요. 그...
-
1960년대 이후 국가 주도의 산업화 정책 추진의 영향을 받아 전국적인 이촌향도(移村向都) 현상이 나타났으며, 수많은 농촌의 구성원이 도시로 이동하였다. 이러한 인구의 이동으로 농촌마을에서는 인구 과소에 따른 유효 노동 인력 부족이, 도시에서는 인구 과밀에 따른 노동인력 과잉으로 실업의 증가라는 모순적인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사회적 양극화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1997년 IMF 외...
-
일제강점기 화양마을이 자리한 광활면 교육은 사립학교, 간이학교, 야학, 서당 등 4가지 유형이 있었다. 그 중 정기적이고 오랫동안 지속된 것은 1934년에 설립된 사립학교로 3년제였다. 사립학교는 해방 후 광활초등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맨 처음 교사로 초빙된 분은 고문선 씨였고, 주로 가르친 과목은 한국어, 일본어, 한문, 산수 등이었다. 고문선 씨는 사립학교를 다닐 수...
-
화양마을 주민들은 자녀가 농사지으러 귀농하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자녀에 대한 기대도 있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기도 하지만, 젊은 시절 자신이 농사와 갯일로 고생하였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우리 아버님이 왜정 때 일본놈들이 땅 개간해 갖고, 그때 우리 아버님이 이민살이를 와 갖고 여기서 나를 낳았지. 내가 1931년생인디, 본토지가 광활여. 난 광활서 낳아서...
-
이민자들에게 자녀는 미래다. 그래서 바다일도 나가고, 땅도 팔아서 자녀들을 교육시킨다. 가깝게는 김제로, 익산으로, 전주로 학교를 보내고, 멀리는 서울까지 유학을 보낸다. 1960년대에 광활면 주민 중 대학생이 192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광활이 지금은 광활하면 김제 가서도 부자 동네라고 그러는데, 예전에 우리 학교 다닐 때 여기 대학생만 192명이나 있었어요. 그니까 왜 그런...
-
화양마을이 자리한 광활면의 하우스 감자 농사는 11월 중후반에 시작해서 이듬해 4월 중순부터 5월 중순까지 계속된다. 하우스 감자의 성공으로 8월 15일에 있던 ‘광활면민의 날’ 행사가 감자 수확기인 4월 10일로 옮겼고, 명칭도 ‘광활햇감자축제’로 바뀌었다. “맨 처음 [하우스 감자를] 광활서 시작한 것은 임인식이여. 그 사람이 맨 처음에 시작혔어. 그 전에는 딸기[를...
-
현재 화양마을이 자리한 광활면은 면소재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마을이 5가구 1개 반을 구성하고 있다. 광활의 마을은 일제강점기 농지와 소작인 관리에 용이하도록 논 가운데 형성되었는데, 현재도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화양1구’와 ‘광활’은 일제강점기 5답구로 불리며 1930년 80세대가 이민을 들어오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동진농업주식회사 직원들이 많이 거주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