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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기 있는 간척 땅에서 자란 쌀은 화양마을이 자리한 광활면의 자랑거리이자 특색으로 손꼽힌다. 일제강점기에는 최상품으로 어느 지역 쌀보다 우대를 받으며 일본 천왕의 밥상에까지 올랐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이 쌀을 ‘다마금의 간척지 쌀, 조센미노’라고 불렀다. ‘다마금’이란 쌀 종자의 이름이다. 당시 소금기에 강하고 수확량이 좋아 일본인들은 광활 지역에서 전부 다마금 종자로 통일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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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화양마을이 자리한 광활면은 일본의 산미증산계획에 의해 간척된 땅으로, 전국 팔도에서 몰려든 이민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민자들은 동진농업주식회사에서 3칸 집과 다섯 필지에 대한 경작권을 제공받았다. 하지만 동진농업주식회사와의 계약에 따라 소출의 절반은 동진농업주식회사에서 가져갔다. 나머지도 각종 소작료, 비료 대금, 관개용수 사용료, 종자 대금, 연차로 갚아 나가야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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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쌀 수탈을 목적으로 한 간척 사업으로 만들어진 땅 광활면에서 가장 큰 숙제는 바로 농업용수 확보였다. 소금기 있는 땅에서 제대로 벼를 수확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일본 당국은 미곡 생산에 중요한 부분인 동진강 유역의 관개용수 확보에 비중을 두고 운암댐 건설에 착수한다. 운암댐은 높이 26m에 이르는 콘크리트 댐으로 섬진강 수계에 건설된 관개용 댐이었다.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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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9월 4일에 불어닥친 태풍으로 광활방조제가 무너져서 논이 물에 잠기자 주민들은 농토를 되찾기 위해 공사를 추진했다. 방조제가 터졌을 당시 논에는 벼들이 고개를 숙이고 수확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대동공업사를 축으로 각 지역에서 인력을 동원하여 방조제를 수리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일단 신작로를 기준으로 둑을 막았다. 빠른 시간 안에 공사를 시작해서인지 둑이 무너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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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들의 광활 생활은 철저한 감시와 통제 속에 이어졌다. 광활면의 9개 답구에는 각 답구를 관활할 답구장이 배치되어 있었다. 9개의 답구장, 답구를 관할하는 3농구의 농구장, 그리고 한 명의 지배인이 있는 구조였다. 이민자들은 공동 경작과 타작은 물론 각종 노동에 강제로 참여할 수밖에 없었기에, 이들을 직접 관리 감독하는 답구장의 위세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강했다. 답구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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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마을이 자리한 광활면에 들어서면 논과 길 옆으로 길게 연결되어 있는 도랑을 볼 수 있다. 다른 지역 사람들이 보면, 땅을 파면 얼마든지 마실 물을 얻을 수 있을 텐데 왜 이렇게 도랑을 만들었는지 의아해 한다. 간척 사업으로 일군 이곳은 다른 지역과 달리 깊이 팔수록 짠기가 그득한 물만 배어 나온다. 할 수 없이 사람들은 식수와 농수를 위해 섬진강 물을 막은 운암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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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마을이 자리한 광활면은 1920년대 후반 바닷물이 넘실거리는 갯벌을 막아 조성된 농토이다. 간척 사업으로 드넓은 농토는 형성되었지만 땅에는 염기[소금기]가 가득 배어 있어 바로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다. 조연식[1927년생]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 부모님이 논의 염기 때문에 동동거리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나락이 크들 못 혔어. 간기가 수북했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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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마을이 자리한 광활은 토지의 대부분이 농경지로 경지 정리가 잘 이루어져 있다. 끝없이 펼쳐지는 넓은 대지에서 수행되는 작업들은 많은 시간과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데, 사람의 노동력만으로 많은 농사일을 감당하기 힘들었기에 새로 출시되는 농기계는 김제시의 광활 지역에 제일 먼저 들어왔다고 한다. 화양마을에 제일 처음 들어온 농기계는 수동식 도보 이앙기인 사조기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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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김제 지역이 전라도 평야 지대에서 생산되는 쌀을 모아 호남선을 통해 군산으로 보내는 배후지의 역할을 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김제는 그런 역할을 떠맡아야 했을까?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자본의 급속한 축적으로 농민의 대량 이동과 도시 노동자의 급증이란 사회 현상이 나타났다. 그 결과 일시적으로 식량 수급(需給)[수요와 공급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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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농촌의 일반적인 경관은 고불고불 외길을 따라 들어가면 산등성이를 병풍처럼 뒤로하고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 펼쳐진다. 이런 풍광(風光)을 기대하고 오는 사람들은 광활면 입구에서부터 어리둥절해진다. 그뿐만 아니라 자칫 하면 길을 잃는다. 산과 구릉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지평선을 보기 힘들다. 그러나 김제평야에서는 하늘과 지평선이 맞닿은 곳을 마음껏 구경할 수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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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은 사람들이 모여살기 시작하면서 생겨난다. 우리나라 마을 대부분은 집성촌(集姓村)으로 씨족이 구성되고, 마을의 역사가 시작된다. 화양마을이 자리한 광활면은 반대로 땅이 먼저 생기고 사람들이 들어온 곳이다. 농토를 일궈 잘 살아 보겠다는 꿈을 안고 전국 각처에서 온 사람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곳은 각성바지들[성이 각각 다른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마을 사람 모두 어렵게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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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활방조제가 완공된 이후 화양마을은 물론이고 광활면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것이 방조제 관리였다. 광활방조제는 일본인 후쿠이가 관할하면서 2년 넘게 공들여 만든 것으로, 광활면의 너른 땅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한 것이 바로 이 광활방조제였다. 그래서 광활방조제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철저한 감독 아래 지속적인 관리를 받아 왔다. 9일에 한 번씩 9개 답구에서 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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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활간척지 조성 사업은 1925년 일본 재벌 아베 후사지로[阿部房次郎]가 자기 자본 백만 엔과 일본 정부 자본 백만 엔으로 김제에 동진농업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공사를 위해 일본 정부는 당시 참모본부에 있던 육군 대좌 후쿠이를 책임자로 불러들였다. 단기간에 많은 인력이 필요한 공사였기에 한국 사람은 물론이고, 중국인들도 1천 명에 가까이 동원되었고, 일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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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마을이 자리한 광활면에는 일본이 산미증산계획의 일환으로 간척지를 막고 건설한 농장이 있다. 1926년 방조제가 완공되면서 형성된 땅은 간척 사업의 책임자 이름을 따 ‘아베농장’으로 불렸다. 1924년은 유래 없는 큰 흉년을 만난 때였다. 전국적으로 흉작이 발생한데다 식민지하의 일본인들에게 토지를 착취당하는 일이 많았다. 전국적으로 계속되는 일본의 압박과 착취 속에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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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활방조제가 터지면서 큰 수해 피해가 났던 때는, 한국전쟁으로 전국에서 사람들이 봇짐을 들고 피난하던 시기와 맞물린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에게 피난민은 낯선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들 역시 팔도에서 이민을 통해 들어온 각성받이들이기에 거주민, 이주민을 구분하지 않았다. 급하게 피난을 온 사람들을 위해 마을에서는 생필품과 식량을 나눠 주면서 동네 사람으로, 이웃사촌으로 따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