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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B010301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 원터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경호

[마을에 들어서면 여기저기서 들리던 뽕잎 갉아먹는 소리]

먹고사는 것이 힘들었던 1960년대 후반 이후 김천 지역을 포함한 전국 대부분의 농촌 마을은 온통 뽕나무로 둘러싸여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천으로 깔린 게 뽕나무였던 그 시절, 누에의 먹이였던 뽕나무는 우리 농가의 주요 자원이었다. 겨울철 농한기 유휴 노동력을 활용해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대표적인 작목이 양잠이었기 때문이다. 잠업은 천수답이 많고 벼농사가 적었던 마을에 큰 소득원이 되어 농가의 생활 수준을 높이는 힘이 되었다. 원터마을도 예외는 아니었다. 원터마을에서 몇십 년씩 살아온 권진순[1923년생] 씨와 이봉화[1943년생] 씨, 이자영[1944년생] 씨, 한영숙[1946년생] 씨 등에게서 뽕나무와 누에에 얽힌 이야기를 특히 많이 들을 수 있었다.

“마을에 가면 누에가 뽕잎 갉아먹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릴 만큼 누에를 치는 집이 많았고, 수매 기간이 되면 온 가족이 매달려 몇날 며칠 밤을 새워 가며 일했지.”

“양잠 누에잖아. 옛날에 많이 했어요. 박정희가 새마을 운동 했잖아요. 저 산골짜기 전부 계단식으로 밭을 만들었어. 저 우에도 만들고. 만들어 가지고 뽕나무를 둑에다가, 뽕나무를 심어 가지고. 밭둑에다가. 그래가 누에 먹이고 그랬어.”

심지어 외지의 젊은 여성들도 마을에 들어와서 누에를 먹일 정도였단다.

“올해 뭐 좀, 뭐한 사람들, 아가씨들도 갖다가. 아가씨들도 여 와서 많이 먹였어. 돈 받고. 지금은 공부로 다 나가지만은 그때는 공부 안 한 사람 많았잖아. 그래서 아가씨들 와 가지고 뽕 먹이고. 옛날에 산에도 뽕 한 정 없는데 그거 다 먹이고 그랬지.”

이처럼 양잠이 원터마을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면서 심지어는 마을 주택의 구조가 변화하는 양상도 발생하였다. 대부분의 가옥에서 잠실을 짓기 시작한 것이다.

“방은 작은데, 누에를 먹여야 돈이 되니깐. 그래 가지고 그래, 저저 흙을 가지고 잠실을 만들어 가지고, 온 동네에 잠실을 지었잖아.”

[집집마다 지었던 잠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 당시 정부는 잠업을 주선했고, 원터마을 주민들도 정부의 지원을 받아 흙벽돌로 잠실용의 부속사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소득이 꽤 괜찮았으나 중국산 명주가 밀려들면서 마을 사람들은 양잠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잠실 건물은 애물단지로 전락하였다. 한 때 이 마을 가옥의 특징적 모습이던 문간채를 겸하는 긴 잠실 건물은 이러한 변화와 더불어 철거 대상이 되어 버려서, 지금은 그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제는 잠실도 다 부셔 버렸어. 우리는 이사 와서 쪼매난 집에 잠실도 없어서 방에서 하고 그랬지.”

원터마을은 지금도 가구의 85%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현재는 벼농사와 양파 농사가 농가의 주 소득원이지만, 1970년대만 하더라도 잠업은 원터마을 사람들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경제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양잠은 무엇보다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다. 그래서 당시에 양잠을 하면서 살았던 마을 주민들은 상당히 고되었다고 옛날 일을 회상하였다.

[그래도 누에 먹여 애들 공부시켰지]

“우리 시집오고 누에 먹인다고 죽을 뻔했다. 옛날에는 삼 삶고 삼베 그것도 하고, 또 여름 되면 그거 하고, 누에는 봄 한철, 가을 한철 두 번 맥이거든.”

“아이고. 나는 처음에 시집와서 누에 먹이는데, 내가 아주 그때만 해도 논에다가 뽕나무 심어 가지고 했었는데. 이 마을이 경지 면적이 좀 적잖아. 그래서 그나마 있는 논도 지금도 4차선 도로도 이래 되고. 논에까지 뽕을 심어 가지고 양잠, 그걸 해서 소득을 하고 그랬지.”

“누에 먹일 때는 새벽에 일어나서, 그러고 나면 아침 할 시간도 없어. 애는 학교 가야 되는데 덤벙덤벙 끊어 가 딸하고 나하고 둘이 누에 먹이고 있으면 그래, 우리도 갖다 주고 아저씨도 조금 주고. 또 따러 가야 돼. 하루 네 번씩 따러 가야 돼. 그래, 고마 지게 지고 가서 쪄 가지고 한 짐 찌고 나면 얼마 되나 그게. 뽕이 부피는 많고 무겁기는 무거워도, 갖고 오면 얼마 안 돼. 그래 가지고 우리는 뽕 주고 할아버지는 뽕 따고. 아저씨는 뽕 져다 나르고. 그러다 보면 하루 종일이라. 하루 종일. 밥 먹을 시간도 없어.”

이처럼 힘든 일이었지만 마을 주민들은 그래도 양잠을 했기에 자식들 공부는 시킬 수 있었다며 당시의 고된 삶을 의미 있게 기억하였다.

“우리 마을이 학구열이 높은데, 돈이 필요하잖아. 양잠 안 했으면 애들 공부를 시킬 수가 있었나. 누에가 우리 애들 공부를 시켜 준 거지. 누에 먹이는 것이야 힘들어도 해야지.”

[정보제공]

  • •  권진순(여, 1923년생, 구성면 상원리 원터마을 주민)
  • •  이봉화(남, 1943년생, 구성면 상원리 원터마을 주민)
  • •  이자영(여, 1944년생, 구성면 상원리 원터마을 주민)
  • •  한영숙(여, 1946년생, 구성면 상원리 원터마을 주민, 연안이씨 종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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