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B010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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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 원터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다희 |
[낯설지만 정겨운 원터마을 가는 길]
6월 여름 따가운 햇볕이 쏟아오는 한낮 김천역에 들어섰다. 김천역 내부 공사 때문에 먼지가 더운 바람과 함께 불어댄다. 조사자는 구성면 상원리 원터마을이란 목적지는 있지만 교통수단을 이용해 가는 방법을 정확히 몰라 무작정 버스에 올라탔다.
“아저씨, 상원리 원터마을 가려면 어떻게 가나요?”
“우선 타소. 여기서 시내버스터미널에 가서 갈아타야 해.”
버스를 탄 지 3분도 채 되지 않아 조사자는 시내버스터미널에서 내려 구성면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그렇게 기다리기를 15분여, 884번이 오자 미리 준비한 1500원을 내고 버스에 올라탔다. 조사자가 터미널에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본 기사 아저씨가 먼저 “어디서 왔어요?”라고 물었다. 대구에서 오는 길이고 김천역에서 내려 버스를 갈아탔다는 얘기를 듣고는, 기차역에서 좌회전해서 육교 방향으로 걸어와 육교를 지나면 바로 버스정류장이 있는데, 그곳에서 버스를 기다리면 884번과 84번을 탈 수 있다고 알려 준다.
김천 중앙시장 부근 정류장에서는 배차 간격이 긴 884번을 많이 기다렸던 듯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제법 많이 모여 있다. 보자기 한 짐 가득 짐을 싣고 타는 모습들이며, 가끔 반주를 한 듯한 할아버지들에게서 풍겨 오는 막걸리 냄새, 할머니들의 촉촉이 젖은 머리에서 나는 파마약 냄새, 나물 값을 내지 않은 할머니가 탔다며 “나물 값 안 내고 가신 분!” 하고 소리치며 출발하려는 버스를 세우는 할머니의 모습 등,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는 흥미진진한 풍경이 884번 버스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낯선 도시 여행자에겐 사소한 소리와 냄새들이 시골의 정취를 물씬 느끼게 해 주었고, 또한 앞으로 도착할 원터마을에 대한 기대와 설레임까지 더해 주고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며 약 30분을 타고 가는 길 내내 지겹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버스 기사 아저씨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가족같이 서로의 일상사를 묻는 구수한 사투리가 기분 좋은 소음으로 들려왔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타고 가는 버스 밖 풍경은 넓은 들판 등을 보여 주며 눈을 정화시켜 줬고, 산을 깎아서 평평하게 만들어 골프장을 건설하려는 곳 옆 작은 나무 사이에 ‘골프장 건설 반대’라는 노란 현수막이 개발과 보존 앞에 홀로 흔들리고 있었다.
버스 기사 아저씨께 종착지를 미리 말씀드렸더니 “아가씨, 여기서 내려야 해”라며 내릴 때까지 기다려 준다. 버스정류장이 따로 없는 곳, 구성파출소 앞에서 내리자 ‘원터마을’이라 적혀 있는 커다란 표지석이 눈에 들어온다.
[원터마을 문화재 둘러보기]
원터마을은 김천 지역에서는 연안이씨의 집성촌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야말로 전통적인 한옥 마을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원터마을을 들어가는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바라보면 바로 방초정이 보여서 유교적이고 전통적인 공간처럼 보이지만, 양옆으로 공장과 초등학교 스쿨버스가 지나가는 변화된 모습도 보이기 때문이다.
적절히 시대의 흐름에 몸을 내맡기면서도 전통적인 공간은 그대로 둔 듯한 조화로운 시골 마을의 모습을 볼 수 있어 들어서는 순간 어색하지 않고 친근감부터 느껴진다. 노란 스쿨버스가 몇 명의 아이들을 태운 채 좁은 원터마을 입구를 지나는 모습과 함께 방초정이 보이면서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보여 오묘한 느낌이다.
방초정 앞 최씨담의 백일홍은 가장 무더운 여름 100일 동안 피고 진다. 그래서인지 6월에 찾아간 원터마을의 방초정은 맞은편 백일홍과 함께 화려한 풍광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때 방초정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어떻게 왔소?”라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 현 원터마을 이장 이응수[1961년생] 씨였다. 조사자가 마을을 둘러보기 위해 왔다는 설명과 함께 방초정에 올라서자 맞은편의 백일홍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여름의 더위를 식혀 준다.
방초정 위에는 이응수 이장 외에도 마을 주민 몇 사람이 모여서 부채질을 하며 쉬고 있었다.
방초정은 과거에는 집성촌의 위계를 잘 나타내 주던 공간이었으나 지금은 마을 주민들이 모이는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문화재가 마을 주민들의 일상 공간이 되어 그들의 삶 속에 자연스레 녹아 있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조사자가 ‘가례증해 판목’을 보고 싶다고 말하자 이응수 이장이 목에 걸린 핸드폰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가례증해 판목은 마을회관 옆 숭례각에서 보관하고 있는데, 열쇠 관리를 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면서,
누구든지 ‘가례증해 판목’을 보고 싶은 사람은 마을 이장을 찾아와 용건을 말하면 열쇠 관리자가 숭례각의 문을 열어 준다고 이응수 이장이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이게 원래 명성재에 보관되고 있던 건데 도난이 워낙 많아 가지고, 그래가 숭례각을 짓고 여기다가 보관하게 됐다니까.”
조사자가 이응수 이장을 따라서 방초정에서 내려와 다시 구성초등학교 방향으로 꺾어 들어가는데, 구성초등학교 쪽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숭례각의 열쇠를 관리하는 이주영 씨였다.
이주영 씨는 친절한 미소로 숭례각의 문을 열어 주고는, 조사자가 숭례각 안을 관람하는 내내 지켜봐 주었다.
숭례각 안쪽 문에 분필로 적혀진 가례증해 판목 개수와 소학집주증해 판목 개수, 그리고 그것들이 차례로 진열된 모습이 인상 깊었다.
“이렇게 잘 보관되어 있는 곳이 없어요. 도난만 안 당했어도.”라며 이응수 이장이 옆에서 설명을 해 준다. 학교나 연구 단체에서 조사차 많이들 찾아오는 마을의 자랑이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이윽고 숭례각에서 나온 조사자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혼자서 마을을 돌아보겠노라고 말한 후 숭례각 뒤편 구성초등학교 옆 샛길로 들어섰다.
응봉산 으로 가는 길인데, 과거 마드리라 불리던 수도곡으로 가는 길이라 했다.
차로 이동하지 않으면 너무 먼 길이라 적당히 구경만 하고 가려 했는데 구성초등학교 뒷산 골짜기에 들어앉은 ‘명성재’가 보였다.
이의조 선생이 강론을 하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이의조 선생의 향사를 지내는 곳으로 사용하고 있다. 나무들 사이에 가려져 있어 잘 보이지 않으니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칠 수도 있는 곳이다.
[원터마을 골목길]
원터마을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아 골목길이 많지 않다. 3개 정도의 큰 골목길을 모두 지나가 보기로 했다. 6·25 전쟁 이후 많은 집들이 파손되고 이후 재건 사업과 새마을 운동 등 인위적인 변화를 거치면서 현실적인 부분에서 적당히 타협을 한 듯한 모습이 많이 보인다. 시멘트 길과 담벼락을 지나다가 골목길 중간쯤에 돌담길이 나온다. 과거 작은 종가로 불렸던 곳인데 현재는 서울에서 관리하는 사람이 가끔 내려오는 정도라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렇지만 어깨 높이의 담장 때문에 사랑채 앞마당에 있는 우물과 염소, 닭들이 뛰어노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이곳을 지나면 과거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든다. 돌담길 옆에 은행나무가 심어져 있어서 가을에는 이 조그만 공간이 은행잎으로 꽉 차 절경을 이룰 것 같다. 골목길 끝에서 오른쪽으로 바라보면 영모재가 있다.
연안이씨 선조들의 묘사를 지내는 공간인데 다른 재실보다 특이한 점이 눈에 띈다. 문에 형형색색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나무 그림, 해 그림, 태극무늬 등 종류도 다양하다. 원터마을 연안이씨 집안의 종손인 이철응[1945년생] 씨의 말로는 그림을 잘 그린 선조 한 분이 재실과 안쪽 벽에 그린 것이란다. 선조께서 후손들이 이 그림을 보고 즐거우라고 그리신 게 아니겠느냐며 웃는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