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17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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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彦儀 |
영어음역 | Yi Eonui |
이칭/별칭 | 윤칙(允則)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감천면 도평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송기동 |
출생 | 160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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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 1637년 |
출생지 | 경상북도 김천시 감천면 도평리 |
묘소 | 경상북도 김천시 감천면 도평리 |
사당 | 경상북도 김천시 감천면 영모재 |
성격 | 의병장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충장위호군 |
[정의]
조선 중기 김천 출신의 의병장.
[가계]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윤칙(允則). 할아버지는 통훈대부 용담현령 이검송(李儉松)이고, 아버지는 진사 이근동(李根東)이다. 어머니는 완산 이씨이며, 부인은 성산 배씨이다. 네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삼남은 통정대부 이은계(李殷繼)이고 사남은 첨정 이은확(李殷確)이다.
[활동 사항]
이언의(李彦儀)[1600~1637]는 지금의 김천시 감천면 도평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행이 남달라 연이어 부모상을 당하자 6년간 여막에서 시묘를 살았는데 밤낮으로 곡을 하니 하늘이 낸 효자라며 칭송이 자자하였다. 주변의 권유에도 과거 시험을 보지 않고 향리에서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며,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나라가 위태로운데 어찌 초야에 묻혀 글만 읽고 있으랴.”면서 사재를 청산해 인근에서 의병을 모아 크고 작은 전투에 나아가 공을 세웠다.
1637년(인조 15) 인조가 남한산성에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경상도 일대의 의병과 관군 4만 명이 합세하여 경상좌병사 허완(許完)과 우병사 민영(閔栐)을 지휘관으로 삼아 근왕병(勤王兵)을 구성하고 남한산성으로 진격하였는데 그해 1월 3일 경기도 광주 쌍령(雙嶺)에서 청나라 기병대와 벌어진 전투에서 이언의는 전사하였다. 전투가 끝난 뒤 청군은 우리 군사들의 시신을 불에 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이언의의 시신도 수습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로부터 3일 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마을 뒷산에서 말의 울음소리가 들려 식솔들이 나가 보니 이언의가 타던 말이 전신에 창상을 입은 채로 피 묻은 투구를 물고 쓰러져 있었다. 그 말은 3일 후 주인을 뒤를 따라 죽었다. 집안에서는 시신도 없이 말이 물고 온 투구를 안장하는 의관장(衣冠葬)으로 대신 장사 지내고 주인이 전사하자 투구를 물고 며칠을 달려 죽음을 알린 의로운 말을 기려 마을 뒷산에 말을 묻은 의마총(義馬塚)을 만들고 의마비(義馬碑)를 세웠다.
[묘소]
묘소는 김천시 감천면 도평리 소용골마을 뒤 성주 이씨 선산에 부인 성산 배씨와 합장묘로 되어 있다. 숫돌봉을 주산(主山)으로 하여 서당골 당산을 백호(白虎)로 하고 맞은편 감덕골을 청룡(靑龍)으로 삼았으며, 감천(甘川)을 넘어 조마면 신안리 안새래마을 뒷산인 마늘골 만역산을 안산(案山)으로 삼았다. 주변으로 드넓게 펼쳐진 들판과 평야 지대를 가로지르는 감천의 위세가 한눈에 조망되는 곳이다.
[상훈과 추모]
조정에서는 병자호란이 끝난 후 경상도관찰사의 천거로 공신록에 이름을 올리고 충장위호군(忠壯衛護軍)을 내렸다. 개령현감 이종상(李鍾祥)이 묘갈문을 지었고, 영모재(永慕齋)를 지어 제향하였다. 경기감사 홍순형(洪淳馨)이 기문을 닦았다. 전사한 이언의의 의관을 물어 왔다는 말 무덤인 의마총과 의마비도 마을 뒤편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