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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갑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809
한자 鄭世甲
영어음역 Jeong Segap
이칭/별칭 조향,율옹(栗翁)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1728년연표보기
몰년 1788년연표보기
출생지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
성격 충의
성별
본관 서산(瑞山)

[정의]

조선 후기 김천 출신으로 무신란 때 공을 세운 인물.

[가계]

본관은 서산(瑞山). 자는 조향, 호는 율옹(栗翁). 고려 후기 문신인 서산 정씨 정인경(鄭仁卿)의 후손이다.

[활동 사항]

정세갑(鄭世甲)[?~1788]은 지금의 김천시 대덕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비상한 재주가 있었으며 사색하는 것을 무척 좋아하였다. 무예에 관심이 많았는데, 특히 활쏘기와 말 타기를 즐겨하였다. 마을 앞 석축 밑의 바위나 나무를 쏘아 맞추면서 활쏘기를 훈련하였고, 그가 무예를 닦던 곳은 사목정이라 하여 지금도 전하고 있다. 경서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천문 지리에도 밝아 미래를 예측하기도 하였다.

1728년(영조 4) 무신란이 발생하자 역적 타도를 외치면서 분연히 일어나 기개를 보였다. 이인좌(李麟佐)정희량(鄭希亮)이 거창을 점령하고 이웅보(李熊輔)가 지례, 김천 지방으로 공격해 오려는 시기였다. 이때 영장 박민웅(朴敏雄)을 찾아가 선봉장으로 삼아 줄 것을 간청한 끝에 군사들과 함께 선봉에 서서 군사들의 사기를 높였다. 정세갑우두령에 진을 치고 허허실실 전략을 구상하였다. 위장술을 통해 군사의 수가 많다는 것을 보이는 한편으로 투항을 권유하였다. 투항만이 역적의 누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적진의 동요를 일으켰다. 단순하게 가담한 사람들은 이 같은 심리전에 반응을 보였고, 그가 뿌린 회유문은 일정한 효과를 거두었다.

적진의 동요를 간파한 정세갑은 일격하여 대군의 위세로 공격하였고, 적장은 겁을 먹고 후퇴하였다. 그는 후퇴하는 적들을 맹렬하게 추격하여 성주 성초역에서 일전을 벌렸다. 이때 관군이 합세하여 협공하였으며, 이웅보와 소두목에 해당하는 10여 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정세갑은 국가가 변란에 처했을 때 큰 공을 세웠으나 한번도 스스로 말한 적이 없으며, 묵묵히 귀향하여 생업에 종사하였다. 주변에서는 관직에 나아갈 것을 여러 차례 권하였으나 담담하게만 받아들여 군자의 모습을 보였다.

『영조실록(英祖實錄)』에 의하면 1724년(영조 즉위년) 유생 정세갑이 상소해 과장에 부(賦)·책(策)을 위주로 할 것과 군포(軍布)를 반감할 것을 청하였다는 기사가 있으나, 같은 사람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상소는 ‘득인무본(得人務本)’으로 네 글자를 근본으로 삼을 것이며, 과장(科場)에 사륙문(四六文)을 내지 말고 오로지 부와 책을 위주로 할 것을 청하고, 양역(良役)은 군포를 반으로 감하고 호전(戶錢)을 행할 것을 청하는 내용이었다. 왕이 아름답게 여겨 칭찬하였다고 하나 역시 같은 사람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상훈과 추모]

무신란이 평정된 후 조정에서 공을 높이 평가하여 양무공신록에 올리고 절충장군을 제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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