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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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楊川里 |
영어음역 | Yangcheon-ri |
이칭/별칭 | 역말,역마을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양천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송기동 |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옛날 마을 앞 감천 변 수양버들이 장관을 이루어 ‘버드나무 양(楊)’자와 ‘내 천(川)’자를 써서 양천(楊川)이라 하였다. 지금도 유동산 아래 도로변에는 몇 그루의 버드나무 고목이 남아 있다. 마을에 양천역(楊川驛)이 있었기 때문에 역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
[형성 및 변천]
조선 말 개령군 부곡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김천군 개령면 양천동으로 개편되었고 1949년 금릉군 개령면 양천동으로 개칭하였다. 1988년 동(洞)을 리로 바꾸어 양천리가 되었고, 1995년 김천시 개령면 양천리가 되었다.
[현황]
양천리는 개령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0.5㎞ 떨어진 마을로 김천 최대의 평야 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2010년 11월 30일 기준 면적은 3.58㎢이며, 2015년 12월 31일 현재 인구는 총 122세대에 289명(남자 150명, 여자 139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으로 감천을 사이에 두고 아포읍 봉산리, 서쪽으로 취적봉을 사이에 두고 덕촌리, 남쪽으로 역마고개를 사이에 두고 동부리, 북쪽으로 광천리와 이웃하고 있으며, 밀양 박씨·김해 김씨·김녕 김씨 집성촌이다. 마을 앞으로 동들등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어 김천 최고의 곡창 지대로 꼽히며, 감천과 나란히 국도 54호선이 지난다.
문화 유적으로는 양천리 고분군, 양천역 터, 동원(東院) 터 등이 있다. 1967년 발굴되어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바 있는 양천리 고분군에서는 삼국 시대 투구와 칼이 출토되었고 석실 내부에 채색의 흔적이 보이는 문양이 발견되었다.
양천역은 조선 초기에 설치되었던 역으로 역을 중심으로 일찍이 역촌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역 주변에 본격적으로 마을이 형성된 것은 밀양 박씨 박성상(朴成相)이 영조 때 입향하면서부터이다. 이후 후손들이 집성을 이루기 시작하였고, 뒤이어 김해 김씨와 김녕 김씨가 들어와 정착하였다. 양천리가 달리 역말·역마을로 불리는 것도 양천역이 있었기 때문이다. 양천역은 김천도(金泉道)에 딸린 남면 부상역, 구성면 작내역, 삼락동 문산역, 대덕면 장곡역과 함께 김천에 설치된 5개 역 가운데 하나였다.
『김천도역지(金泉道驛誌)』에 따르면 양천역에는 중마(中馬) 2필, 소마(小馬) 3필, 역리(驛吏) 33명, 사창(社倉) 1칸, 전답(田沓) 43결이 딸려 있었다. 당시 역은 현재의 마을회관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1895년 폐지된 이후 지금은 당시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다만 동부리와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를 역말 또는 말고개, 관용 숙소였던 동원이 있던 원터 등 역과 관련된 일부 지명이 남아 있을 뿐이다.
양천리는 또한 동부리와 함께 고대 국가의 중심지였던 까닭에 성안골[城內谷]·진대골[陳大谷] 등 감문국과 관계된 지명과 흔적이 남아 있다. 성안골은 마을 뒷산인 감문산의 골짜기로 옛날 감문국 시대에 이곳에 성이 있어 붙인 이름이다. 마을 주민에 따르면,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운동장 크기는 족히 됨직한 공터와 주변 성곽의 형태가 뚜렷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진대골은 마을 앞 감천 변 옛 빨래터 일대를 일컫는 지명으로, 감문국 시대에 군사들이 일대에서 진영(陣營)을 펼치고 조련을 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