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09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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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說 |
영어음역 | Kim Yeol |
이칭/별칭 | 김처사(金處士)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박도식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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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김광헌(金光軒) |
어머니 | 최세번(崔世蕃)의 딸 |
출신지 | 강릉 |
성별 | 남 |
생년 | 1506년(중종 1) |
몰년 | 미상 |
본관 | 강릉 |
제향 |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 2920-16[교동 238-3] 향현사 |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강릉. 김주원(金周元)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진사 김광헌(金光軒)이고, 어머니는 강릉최씨 현감 최세번(崔世蕃)의 딸이다.
[생애]
김열(金說)의 아버지 김광헌은 1519년(중종 14)에 진사에 올랐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를 겪고 난 후에 과거에 뜻을 버렸다. 김열(金說) 또한 과거에 나아가지 않고 형제들과 더불어 오직 글 읽기에만 힘썼다. 아무리 춥고 더운 날씨에도 의관(衣冠)을 흐트러지게 하는 일이 없었다. 형제들과 모두 1리 안팎에 모여 살면서 아우들이 열심히 학문을 하도록 독려하였다. 『시경(詩經)』·『서경(書經)』·『주역(周易)』·『춘추(春秋)』 등의 해석문을 지어 자손에게 물려주었다.
중종 때 효렴과(孝廉科)로 평강훈도(平康訓導)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그 후에도 누차 제수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만년에 경포호 북쪽에 임경당(臨鏡堂)을 짓고 “모든 선현(先賢)의 글들을 책상과 궤에 가득히 채워 때로는 성리(性理)의 깊은 뜻을 탐구하고 때로는 강호(江湖)의 정취(情趣)에도 젖어본다.”라는 제자(題字)를 써 걸었다. 강호(江湖)에 머물며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김처사(金處士)’라 불렀다.
[활동사항]
김열(金說)은 자신과 친분이 두터운 고관에게 「송어시(松魚詩)」를 주어 사화(士禍)를 면하게 하였다고 한다. 일찍이 한 달관(達官)이 강릉에서 벼슬을 하다가 영전(榮轉)하게 되었을 때, 비단에 다음과 같은 시를 써서 송어의 배에 넣어 그 사람에게 보냈다. 그 시에는 “은비늘 번뜩이며 기력이 왕성하니 벼슬길 확 트여 높은 곳 오르겠네. 아깝도다! 나갈 줄은 알았지 물러날 줄 모르니, 넓고 넓은 이 세상 잃을까 염려되네.”라고 쓰여 있었다. 이 글을 본 달관은 병을 핑계대고 벼슬을 사양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 사화가 일어났으나 홀로 화를 면하였다. 고을 사람들은 김열(金說)의 선견지명에 감복하였다고 한다.
김열(金說)의 집 앞에는 아버지 김광헌(金光軒)이 손수 심은 소나무 수백 그루가 있었다. 김열(金說)은 아우와 함께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이 소나무를 보호하고 기르는 데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이에 도의지우(道義之友)로 사귀던 율곡(栗谷) 이이(李珥)에게 소나무를 가리키면서 “나의 선친께서 손수 심으신 것인데 우리 형제 모두가 이 집에서 저 소나무를 울타리로 삼고 지내고 있네. 그래서 이 소나무들을 볼 때마다 선친을 생각하곤 한다네. 이러한 소나무를 내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지키기 어려울 것 같아 도끼나 낫으로 베고 잘라 후손들에게까지 온전하게 전하지 못하고 없어질까 늘 두려운 마음뿐이라네. 그대가 이를 보호할 수 있는 교훈될 만한 말을 몇 마디 써 주면 집안 사당벽에 걸어 놓고 자손들로 하여금 늘 이를 보게 하여 가슴 깊이 새기게끔 하겠네.”라고 말하니,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호송설(護松說)」을 지어 주었다.
[묘소]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구산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