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693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유상수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에 있는 이화약국을 개업한 약사.
[가계]
정광훈[?~2004]의 장남 정지건 약사는 이화약국을 물려받아 경영을 하였고, 차남 정지홍이 이화약국 건물에 이화한의원을 개업하였다. 장녀 정성애는 이화피부과를 개업하였는데, 현재는 의사가 6명에 달할 정도로 전국적으로 이름이 높다. 차녀 정지향은 이화치과를 개업하여 운영하고 있다.
[활동 사항]
정광훈은 일본 이화제약회사에 다니다가 이화약국을 창업하였다. ‘이화약국’이라 이름지은 것은 자신이 이화제약회사에 다녔기 때문이었다. ‘이화(梨花)’가 아닌 ‘이화(理化)’이다. 초기에는 주로 피부질환치료제를 판매하였는데, 이화제약회사 자체가 피부질환치료제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회사였기 때문에 정광훈도 여기에서 배운 것을 토대로 피부치료제를 만들어서 판매하였다. 그런데 효과가 매우 좋아 이화약국의 연고를 바르면 피부병이 무조건 낫는다는 말이 돌 정도로 효과도 좋았고, 많은 손님들이 이화약국을 찾았다.
그런데 연고를 넣을 통이 부족해서 바닷가에 흔하던 조가비를 가져다가 연고를 담아 판매를 하였다. 조가비 양쪽을 열고 연고를 담아 누르면 기가막힌 연고통이 되었다. 이화약국을 다녀간 사람마다 조가비를 들고 나왔고, 이것이 이화약국의 상징이 되었다. 나중에 가계를 이은 장남 정지건은 연고를 담는 통을 새로 만들었는데도, 많은 단골고객들은 기존의 조가비를 달라고 떼를 썼다고 한다. 물론 초록색 연고통에 ‘이화조가비’라고 쓰고 조가비를 그려넣어서 해결을 했지만 그만큼 정광훈 약사의 연고와 조가비는 이화약국의 상징이었다. 장남인 정지건이 이화약국을 경영한 후에도 이화약국은 번성하여 의약분업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하루 약 1500명의 손님들이 이화약국을 찾았다고 한다. 2004년 4월 21일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