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6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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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承晩 |
영어공식명칭 | Rhee Syngman |
이칭/별칭 | 우남(雩南)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이혜영 |
출생 시기/일시 | 1875년 3월 26일 - 이승만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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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879년 - 이승만 낙동서당 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885년 - 이승만 도동서당 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895년 4월 2일 - 이승만 배재학당 입학 |
활동 시기/일시 | 1896년 11월 30일 - 이승만 협성회 결성 |
활동 시기/일시 | 1898년 1월 1일 - 이승만 협성회회보 창간 |
활동 시기/일시 | 1898년 3월 - 이승만 만민공동회에서 연사로 활약 |
활동 시기/일시 | 1898년 8월 10일 - 이승만 제국신문 창간 |
활동 시기/일시 | 1898년 11월 26일 - 이승만 중추원 의관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899년 1월 9일 - 이승만 한성감옥 수감 |
활동 시기/일시 | 1900년 8월 - 이승만 『중동전기본말』 한글로 번역 |
활동 시기/일시 | 1904년 - 이승만 『독립정신』 집필 |
활동 시기/일시 | 1904년 8월 9일 - 이승만 석방 |
활동 시기/일시 | 1904년 11월 4일 - 이승만 루스벨트 대통령 및 헤이 국무장관과 면담 |
수학 시기/일시 | 1905년 2월 - 이승만 조지워싱턴대학 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907년 9월 - 이승만 하버드대학 석사과정 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908년 9월 - 이승만 프린스턴대학교 박사과정 입학 |
활동 시기/일시 | 1910년 10월 10일 - 이승만 청년학교 학감 취임 |
활동 시기/일시 | 1912년 3월 26일 - 이승만 미국 망명 |
활동 시기/일시 | 1912년 8월 - 이승만 한인기숙학교 교장 |
활동 시기/일시 | 1912년 9월 20일 - 이승만 『태평양잡지』 창간 |
활동 시기/일시 | 1913년 2월 3일 - 이승만 『한국교회핍박』 출간 |
활동 시기/일시 | 1914년 7월 29일 - 이승만 한인여자[성경]학원 설립 |
활동 시기/일시 | 1918년 7월 29일 - 이승만 신립교회 창설 |
활동 시기/일시 | 1918년 12월 1일 - 이승만 대한인국민회의 파리평화회의 한인 대표 선출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14일 - 이승만 한인대표자대회 개최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23일 - 이승만 한성임시정부 집정관 총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8월 25일 - 이승만 워싱턴에 구미위원부 설치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9월 6일 - 이승만 상해임시정부 의정원에서 임시대통령 선출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12월 5일 - 이승만 상해 도착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6월 29일 - 이승만 대한인동지회 조직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3월 11일 - 이승만 임시대통령직에서 해임 |
활동 시기/일시 | 1933년 1월 - 이승만 한국독립 청원운동 전개 |
활동 시기/일시 | 1941년 4월 20일 - 이승만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외교위원장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941년 6월 4일 - 이승만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941년 6월 - 이승만 『일본내막기』 출간 |
활동 시기/일시 | 1942년 1월 16일 - 이승만 한미협회[The Korean-American Council] 창설 |
활동 시기/일시 | 1943년 - 이승만 미국 정부를 상대로 임정 승인과 무기 지원 활동 전개 |
활동 시기/일시 | 1945년 10월 16일 - 이승만 귀국 |
활동 시기/일시 | 1945년 10월 23일 - 이승만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조직 |
활동 시기/일시 | 1946년 2월 8일 - 이승만 대한독립촉성국민회로 확대 개편 |
활동 시기/일시 | 1946년 2월 25일 - 이승만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장 선출 |
활동 시기/일시 | 1946년 6월 3일 - 이승만 정읍 발언 |
활동 시기/일시 | 1946년 6월 29일 - 이승만 민족통일총본부 총재 취임 |
활동 시기/일시 | 1948년 5월 10일 - 이승만 제헌의회의원선거 당선 |
활동 시기/일시 | 1948년 7월 20일 - 이승만 대통령 선출 |
활동 시기/일시 | 1949년 6월 6일 - 이승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습격 |
활동 시기/일시 | 1949년 8월 8일 - 이승만 장제스와 회담 |
활동 시기/일시 | 1950년 3월 - 이승만 농지개혁 실시 |
활동 시기/일시 | 1951년 11월 23일 - 이승만 자유당 창당 |
활동 시기/일시 | 1952년 5월 25일 - 이승만 부산정치파동 |
활동 시기/일시 | 1952년 7월 4일 - 이승만 제1차 개헌안 통과[발췌개헌] |
활동 시기/일시 | 1952년 8월 5일 - 이승만 제2대 대통령 당선 |
활동 시기/일시 | 1953년 6월 18일 - 이승만 반공포로 석방 |
활동 시기/일시 | 1953년 10월 1일 - 이승만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
활동 시기/일시 | 1954년 11월 27일 - 이승만 제2차 개헌안 통과[사사오입 개헌] |
활동 시기/일시 | 1956년 5월 15일 - 이승만 제3대 대통령 당선 |
활동 시기/일시 | 1958년 12월 24일 - 이승만 국가보안법 개정안 통과 |
활동 시기/일시 | 1960년 3월 15일 - 이승만 제4대 대통령 당선 |
활동 시기/일시 | 1960년 4월 26일 - 이승만 대통령직 하야 |
활동 시기/일시 | 1960년 5월 29일 - 이승만 하와이 망명 |
몰년 시기/일시 | 1965년 7월 19일 - 이승만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75년 7월 12일 - 우남 이승만 박사 기념사업회 창립준비위원회 조직 |
추모 시기/일시 | 2007년 8월 - 이승만대통령 화진포기념관 개관 |
출생지 | 이승만 출생지 -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능내동 |
거주|이주지 | 돈암장 - 서울특별시 성북구 동소문동4가 103 |
거주|이주지 | 마포장 -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대로4길 122 |
거주|이주지 | 이화장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화장1길 32 |
거주|이주지 | 취원각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신방1길 114 |
거주|이주지 | 이승만 별장(고성) -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이승만별장길 33 |
거주|이주지 | 이승만 별장(진해)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현동 71 |
거주|이주지 | 이승만 별장(제주)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 산155 |
학교|수학지 | 배재학당 - 서울특별시 중구 서소문로11길 19 |
활동지 | 한성감옥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통일로 251 |
활동지 | 황성기독교청년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69 |
활동지 | 중앙청(제헌의회 개원) - 서울특별시 세종로 1번지 |
활동지 | 경무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로 1 |
활동지 | 임시경무대(대전) - 대전광역시 중구 중앙로 101 |
활동지 | 임시경무대(부산) - 부산광역시 서구 임시수도기념로 45 |
활동지 | 자유당사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진동 36번지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
성격 | 정치인 |
성별 | 남 |
본관 | 전주 |
대표 경력 | 대통령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정치인.
[개설]
이승만(李承晩)[1875~1965]의 호는 우남(雩南)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대통령과 대한민국 제1, 2, 3대 대통령, 제헌의회 임시의장, 자유당 총재를 지낸 정치인이다.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양녕대군의 16대손이다. 이경선(李敬善)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김해 김씨이다.
[활동 사항]
이승만은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능내동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서울로 이사했다. 낙동과 도동에 있는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했고, 과거제도가 폐지된 후 1895년 4월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1896년 배재학당에서 협성회를 결성하고 『협성회회보』를 창간해 주필을 맡았다. 또한 1898년 8월 『제국신문』을 창간하고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독립협회 활동에도 적극 가담해 1898년 3월에는 만민공동회에서 연사로 활약했으며, 그해 11월 익명서사건으로 독립협회 간부들이 체포되자 대중들을 이끌고 철야 농성을 벌였다. 이 사건이 있고 나서 이승만은 독립협회를 달래기 위한 정부측 조치의 일환으로 다른 독립협회 인사들과 함께 중추원 의관[종9품]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1899년 1월 고종 폐위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한성감옥에 수감되었다. 수감 기간 동안 이승만은 『제국신문』 등에 수시로 논설을 실었으며, 중국에서 출간된 『중동전기본말』을 한글로 번역하고 『독립정신』을 집필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5년 7개월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8월 9일 특별사면을 받아 석방되었다. 그리고 11월 민영환과 한규설의 특사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미국에서 이승만은 헤이 미국 국무장관과 루스벨트 대통령을 면담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후 이승만은 유학생활을 시작해 조지워싱턴 대학과 하버드 대학, 프린스턴대학에서 학사 및 석박사 과정을 밟았고, 1910년 7월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해 10월 귀국한 이승만은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한국인 총무와 청년학교 학감으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1912년 105인 사건으로 기독교 계열에 대한 일제의 압박이 강화되자 그해 2월 국제감리교대회 참석을 구실 삼아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 도착 후 이승만은 옥중동지인 박용만의 도움으로 하와이 호놀룰루에 정착했다. 이곳에서 『태평양잡지』를 창간했으며 105인 사건을 폭로하는 『한국교회핍박』을 출간했다. 또한 한인기독학원과 한인기독교회를 설립, 운영하는 등 주로 교육과 선교 분야에서 활동했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은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재정 문제 등을 둘러싸고 박용만과 충돌하기도 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자 이승만은 대한인국민회의 파리평화회의 한인대표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여권 발급 문제로 파리행은 좌절되었고, 이승만은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둘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한편 이승만은 1919년 3·1운동 직후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등으로 추대되었다. 특히 4월 23일 국내에서 선포된 한성정부는 이승만을 집정관총재에 임명했는데, 이 소식을 접하고 ‘대한공화국’ 대통령 명의로 각국의 국가원수들에게 한국의 독립 선포를 알리는 공문을 발송했다. 또한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김규식을 위원장에 임명했다. 하지만 이승만의 ‘대통령’ 명칭 사용은 임시정부 통합 과정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 1919년 9월 6일 임시의정원은 이승만을 임시대통령으로 추대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했다. 이승만은 1920년 12월 임시대통령직 수행을 위해 상해에 도착해 약 6개월간 체류했다. 그리고 1921년 5월 상해를 떠나 호놀룰루에서 대한인동지회를 조직하고 다시 군축회의가 열리는 워싱턴으로 갔다. 하지만 군축회의 의제로 한국의 독립 문제를 상정시키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1922년 9월 하와이로 돌아왔다.
한편 그동안 상해에서는 이승만에 대한 불만이 비등해져 1925년 3월 11일 임시의정원은 이승만을 탄핵해 대통령직을 박탈했다. 국제연맹 위임통치 청원과 미국에 있으면서 임시대통령의 직책을 방치했다는 점, 임시정부에 대한 재정차단 시도, 임시의정원의 결의를 무시한 점 등이 그 이유였다. 구미위원부에 대해서도 폐지령을 내렸다. 이후 강연활동 등으로 소일하던 이승만은 1932년 국제연맹에서 일본의 만주 침략 문제를 토의하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제네바로 갔다. 하지만 구체적인 성과는 없었고, 모스크바와 뉴욕을 거쳐 1935년 하와이로 돌아왔다. 하와이에서 동지회 활동과 함께 강연 여행을 다니던 이승만은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1939년 워싱턴으로 갔다.
그리고 다음해인 1940년 임정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에 임명되어 임정과의 관계를 회복했다. 그해 태평양전쟁을 경고하는 『일본내막기』를 출간한 이승만은 1941년 실제로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정부를 상대로 임시정부 승인과 무기대여 청원외교를 벌었다. 또한 미국의소리[VOA] 방송을 통해 독립운동을 독려하고,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중국내 한인 게릴라부대 조직 문제를 협의했다. 1945년 종전이 다가오자 이승만은 얄타밀약설을 제기하는 등 반소반공선전에 주력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한 후 이승만은 10월 16일 33년만에 한국에 돌아왔다. 귀국 직후인 10월 23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해 총재에 추대되었으며, 1946년 2월 8일 이를 대한독립촉성국민회로 확대 개편했다. 또한 1946년 2월 25일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두고 미군정이 자문기관으로 조직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장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이승만은 미군정에 의해 의장직에서 물러났고 서울을 떠나 지방 유세에 나섰다. 그리고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6월 3일 전라북도 정읍에서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자는 단정 발언을 하여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서울로 돌아온 이승만은 민족통일총본부를 결성하고, 1946년 12월 미국으로 가 미국 정부와 여론을 상대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호소했다.
1947년 4월 중국을 경유해 귀국한 이승만은 1948년 5월 10일 유엔 결의에 따라 실시된 제헌의회 선거에서 동대문 갑구에서 출마해 당선되었다. 최고령 의원으로 제헌의회 임시의장에 선출된 이승만은 헌법 제정작업을 마치고 7월 20일 의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7월 24일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후 일민주의를 통치 이념으로 내세우고 여순사건을 계기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는 등 정권 안정화에 힘을 기울였다. 1949년 6월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습격해 무력화시켰으며 농지개혁법을 제정, 공포하였다. 통일문제와 관련해서는 북진통일론을 주장해 북한 정부를 부정하는 태도를 취했다.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발발하자 대전을 거쳐 부산에 임시수도를 정했다. 그리고 정권의 조직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1951년 12월 자유당을 창당하고, 다음해 5월에는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켜 대통령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계엄령 하에서 통과시켰다. 1952년 8월 5일 제2대 정부통령선거에서 재선된 이승만은 1953년 들어 정전협정 체결이 가시화되자 이에 반대해 6월 18일 반공포로 석방을 단행했다. 이로 인해 미국과 갈등을 빚던 이승만은 휴전협정 체결 후인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1954년 5월 20일 실시된 제3대 민의원선거를 통해 의회를 장악한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철폐하는 개헌을 추진했다. 이 개헌안은 11월 27일 ‘사사오입’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통과되었다. 1956년 이승만은 제3대 정부통령선거에 출마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1958년 12월 24일 차기 정부통령선거에 대비해 야당의 반대 속에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제4대 정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은 이기붕과 함께 자유당 후보로 출마했다. 이 선거에서 이승만은 4선에 성공했지만, 선거 부정에 항의해 일어난 4월 혁명으로 인해 결국 4월 26일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에 머물다가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했다. 1965년 7월 19일 하와이 호놀룰루 요양원에서 사망했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청일전기』, 『독립정신』,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 『한국교회핍박』, 『일본내막기』, 『일민주의개술』 등이 있다.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원수묘역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