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6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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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劉如大 |
이칭/별칭 | 낙포(樂圃)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황민호 |
출생 시기/일시 | 1878년 11월 26일 - 유여대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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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98년 - 유여대 기독교 세례 |
활동 시기/일시 | 1905년 - 유여대 양실학원 설립 |
수학 시기/일시 | 1915년 - 유여대 평양신학교 졸업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일 - 유여대 3·1운동 참가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11월 6일 - 유여대 출옥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2월 - 유여대 의산노회장 선출 |
몰년 시기/일시 | 1937년 1월 13일 - 유여대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62년 - 유여대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
출생지 | 유여대 출생지 - 평안북도 의주군 주내면 서호동 |
활동지 | 유여대 독립운동 활동지 - 평안북도 의주군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목사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독립운동가.
[개설]
유여대(劉如大)[1878~1937]는 1919년 3·1운동에 민족대표의 일원으로 참가하였으며, 양실학원 등을 설립하여 근대 교육운동을 전개한 장로교계의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가계]
유여대의 본관은 강릉(江陵)이며, 호는 낙포(樂圃)이다. 아버지 유택현(劉澤賢)과 어머니 윤치현(尹致賢) 사이에서 3대독자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유여대는 1878년 11월 26일 평안북도 의주군 주내면(州內面) 서호동(西湖洞)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에는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는데 두 번이나 효자문(孝子門)을 받을 정도로 효성이 지극했다.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어 ‘유이학(劉理學)’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1898년 북장로교 선교사 휘트모어(Whittemore, N. C.)[한국명 위대모(魏大模)]를 만나 세례를 받았다. 1905년 여성들의 근대교육을 위해 양실학원(養實學院)을 설립하였다.
1910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1915년에 졸업하였으며, 목사 안수를 받은 뒤 의주동교회 담임목사가 되었다. 1919년 2월 12일 선천(宣川)에서 열린 평북노회에 참석했다가 양전백(梁甸伯), 이승훈(李承薰), 김병조(金秉祚) 등으로부터 3·1운동 준비에 관한 소식을 듣고 민족대표의 일원이 될 것을 승낙하여 이승훈에게 인장(印章)을 맡겼다. 이후 양실학원과 교회를 중심으로 의주 지역의 3·1운동을 주도했다. 이로 인해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3월 7일 평양지방법원 신의주지청 검사국에서 취조를 받았고 1920년 10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받았다.
1921년 11월 16일 경성감옥에서 만기 출옥하였으며, 1925년 2월 제13회 의산노회 노회장에 선출되었다. 1934년 병을 얻어 교회 일을 사직하고 휴양에 들어가 저술활동에 전념했다. 활발한 저술활동과 계몽활동을 전개하던 중 1937년 1월 13일에 사망했다.
[저술 및 작품]
유여대는 한글, 한자, 일본어의 각종 서식 작성법과 상식을 설명한 『면무식(免無識)』[1935]을 비롯하여 여러 권의 저서를 남겼다. 『면무식』은 초판을 발행한 지 반년도 되지 않아 절판되어 1936년 2월에 증보 재판하기도 했다. 이후 동서고금의 위인들을 소개한 『위인기담(偉人奇談)』[1935], 설교들을 모은 『강도예전화(講道例傳話)』[1935], 『강대지남(講臺指南)』[1937] 을 간행했다.
[묘소]
유여대의 유해는 신의주시 고성(古城)묘지에 안장되었다. 1971년 1월 20일에는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에 묘소가 조성되었다.
[상훈과 추모]
정부에서는 1962년 고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