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651
한자 延基羽
영어공식명칭 Yeon Gi-u
이칭/별칭 민우(敏宇),기우(起羽),기호(基浩),봉렬(奉烈)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조은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907년 9월 - 연기우 의병 봉기
활동 시기/일시 1908년 1월 - 연기우 13도창의대진소 대대장 취임
몰년 시기/일시 1911년연표보기 - 연기우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2년연표보기 - 연기우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위패봉안관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지도보기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대대장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봉안된 개항기 의병장.

[개설]

연기우(延基羽)[?~1911]는 대한제국 강화 진위분견대 부교(副校) 재직 중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해산을 계기로 의병 봉기하여 1908년 1월 13도창의군 서울진공작전에 참가한 인물이다.

[가계]

연기우는 상주목사를 지낸 연비(延庇)의 13세손으로 전해진다. 본관은 곡산(谷山)이다.

[활동 사항]

강화(江華) 진위분견대 부교(副校)로 재직 중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 해산이 결정되자 8월 2일 전 대대장이던 참령(參領)[현재 소령] 이동휘(李東輝) 주도로 전등사(傳燈寺)에서 진행된 봉기 논의에 동참했다. 강화 진위분견대가 1907년 8월 9일 전격 해산되자 이에 항거해 참교(參校) 유명규, 지홍윤 등과 해산 군인을 규합해 봉기군의 대오를 정비하고 무기고를 파괴해 총기를 탈취하는 등 무장을 갖추었다. 진위대 해산 임무를 띠고 8월 10일 서울에서 갑곶(甲串)으로 상륙한 일본군 제14연대 소속 오사키[大崎] 소위 휘하의 1개 소대를 공격해 일본군 6명을 사살하고 5명을 부상시키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월등한 화력으로 수세에 몰려 진위대 부교 지홍윤(池弘允) 등과 강화도에서 철수했다.

이후 해서지역과 임진강 방면으로 이동해 경기 장단군(長湍郡) 덕물포(德物浦)에 이르러 의진을 정비하고 창의(倡義)의 기치를 세우면서 의병장이 되었다. 1907년 가을부터 임진강 유역의 연천, 적성 등지에서 김규식(金奎植), 권중설(權重卨) 등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활동했다. 1907년 말 전국 의병 연합체로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가 결성되자 양주(楊州)로 집결하여 1908년 1월 말 서울진공작전 전개 시 십삼도창의대진소 대대장 직책으로 참가했다.

서울진공작전이 좌절되고 십삼도창의대진소가 해산되자 경기 마전(麻田)과 장단(長湍)을 중심으로 포천, 삭녕, 철원, 연천, 적성 등 경기 북부지방을 거점으로 황해, 강원 접경지대에서 활동을 전개했다. 인근의 강기동(姜基東)·이진룡(李鎭龍)의 의진과 수시로 연합해 공동작전을 벌였다. 1909년 8월 경 회유와 귀순을 목적으로 삭녕수비대장이 면담을 시도했으나 단호히 거절하고 의진을 계속 이끌었다. 1910년 3~4월 경 일본군의 경기 북부와 황해 의병 탄압작전에서 패전하면서 철원에서 일시 체포되었다가 구출되고 6월에는 철원 헌병대에게 방탄요갑(防彈腰甲)을 빼앗길 만큼 전력이 고갈되었다. 1911년 12월 부하 3명과 경기 가평의 헌병대와 조우하여 교전 중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위패봉안관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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