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6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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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錫九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장경호 |
출생 시기/일시 | 1875년 5월 3일 - 신석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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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2년 - 신석구 전도사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신석구 민족대표 33인에 참여 |
출생지 | 신석구 출생지 - 충청북도 청주군 미원면 금관리 초개동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선열묘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
성격 | 독립운동가|목사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민족대표 33인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독립운동가.
[개설]
신석구(申錫九)[1875~?]는 목사이자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사람으로 초기에는 방탕한 생활을 했다가 기독교에 입문한 후 각성, 여러 곳을 다니면서 목회 활동을 했다. 일제의 강제 신사참배 당시 거부하였고 북에 납북당했을때도 끝까지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유지하였다.
[가계]
아버지는 신재기이고, 어머니 청해 이씨이다. 형은 신석규이다.
[활동 사항]
신석구는 1875년 5월 3일 충청북도 청주군 미원면 금관리 초개동에서 태어났다. 어린나이에 부모를 여의었던 신석구는 결혼하지도 않고 동거를 하는 등 방탕생활을 하다가 친구가 하는 전당포 서기를 맡게 되었고, 사기횡령죄를 뒤집어 쓴 친구를 대신하여 감옥에 들어갔다.
1907년 훈장직을 거부하고 친구 김진우의 권유로 경기도 연천군 고랑포에서 약을 팔다가 김진우가 기독교 전도인으로 전도하자 기독교에 귀의하여 1907년 고랑포교회 첫 예배에 참석하였다. 협성신학당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했고, 1908년에는 개성남부교회에서 주일학교를 담당했다. 이후 강원도 홍천읍교회에서 권사로 있다가 1912년 전도사가 되었고, 1914년 가평 지역 전도사를 맡았다.
서울 수표교교회에서 사역하고 있던 신석구는 1919년 오화영으로부터 천도교와 같이 독립운동을 하겠냐는 물음에 고민 끝에 승낙하였고 3·1독립선언서에 기독교측 대표로 서명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감옥에 갔다가 출옥했다. 중일전쟁이 닥치고 일제에 의한 신사참배를 강요받게 되자 감리교회는 일제에 순응하였지만, 감리교회 목사인 신석구는 끝까지 거부하다가 또 다시 투옥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기독교자유당 창당 결의 등에 참여하였지만 6·25전쟁 이후 인민교화소에서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저술 및 작품]
번역서로는 『빌립보서 주석』이 있다.
[묘소]
1968년 9월 18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선열묘역에서 의관장이 거행되었다.
[상훈과 추모]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