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6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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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健命 |
이칭/별칭 | 중강(仲剛),한포재(寒圃齋),충민(忠愍)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차인배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 부근에 있었던 사충서원에 배향된 조선 후기 문신.
[가계]
이건명(李健命)[1663~1722]의 증조는 이수록(李綏祿)이며, 조부는 영의정 이경여(李敬輿)이다. 아버지는 이조판서 이민서(李敏敍)이며, 어머니는 원두표(元斗杓)의 딸이다.
[활동 사항]
이건명은 1684년(숙종 10)에 진사시(進士試), 1686년 춘당대문과 을과로 급제하여 설서(設書), 사서(司書), 헌납(獻納), 교리(校理), 이조좌랑(吏曹佐郞), 이조정랑(吏曹正郞), 응교(應敎) 등을 거쳤다. 경종 즉위 후 좌의정에 임명되었고 노론의 영수로서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을 주도하였고, 주청사로 파견되어 세제 책봉에 대한 청 황제의 고명(誥命)을 받아왔다. 1722년(경종 2)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전라도 흥양[오늘날 고흥군]의 사도(蛇島)에 위리안치되었다가, 나로도(羅老島)로 이배(移配)되었다. 그곳에서 주청사로 청에 갔을때 ‘위약(痿弱)과 ‘양잉(兩媵)[좌우의 잉속]’이란 부도한 말로 임금을 속여다는 죄’로 참형을 당하였다.
[학문과 저술]
이건명의 저서로 시문과 소차(疏箚)를 모은 『한포재집(寒圃齋集)』 10권이 전한다.
[묘소]
이건명의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맥금동 432-26에 있다.
[상훈과 추모]
영조는 신임옥사때 희생된 노론4대신인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의 관작(官爵)을 회복시키고, ‘충(忠)’자가 들어간 시호(諡號)를 내렸다. 나아가 영조는 과천(果川)의 반계(盤溪)에 사우(祠宇)를 건립했다. 이때 이건명은 충민(忠愍)이라는 시호를 받고 사우에 봉안되었다.
1727년(영조 3) 정미환국(丁未還局)으로 소론 정권이 집권하면서 4대신이 또다시 역적으로 몰려 사우 또한 철폐되었지만, 1740년(영조 16) 소위 경신처분(庚申處分)으로 4대신의 관작을 회복하여 신원되었다. 철폐된 사우는 소론이 정치적으로 완전히 몰락한 1755년(영조 31)에 사충사(四忠祠)로 복설되었다. 사충서원(四忠書院)이 과천[오늘날 노량진]에 건립된 이유는 ‘4대신이 모두 과천 땅을 왕래하였고, 지역 유생들이 소원하였으며, 사육신의 서원과 지근거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충서원은 대원군에 의한 서원 철폐 당시에도 존속했지만, 1927년 서원이 철도부지로 편입되면서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보광리로 이건되었다. 1950년 6·25전쟁 당시 서원이 파괴된 후, 1968년 현재의 경기도 하남시 상산곡동 100-2에 이전하여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