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5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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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徐居正 |
이칭/별칭 | 자원(子元),강중(剛中),사가정(四佳亭),정정정(亭亭亭),문충(文忠),달성군(達城君)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선희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지역에 있었던 효사정에 대한 시를 지은 조선 전기 문신.
[가계]
서거정(徐居正)[1420~1488]의 본관은 대구(大丘)이다. 자는 강중(剛中)·자원(子元), 호는 사가정(四佳亭), 정정정(亭亭亭)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서익진(徐益進)이고, 할아버지는 호조전서(戶曹典書) 서의(徐義)이다. 아버지는 목사(牧使) 서미성(徐彌性)이고, 어머니는 권근(權近)의 딸이다. 자형(姉兄)이 최항(崔恒)이다.
[활동 사항]
서거정은 1438년(세종 20)에 생원시와 진사시 두 시험에 합격하고, 1444(세종 26)에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재 직장(司宰直長)에 제수되었다. 곧이어 집현전 박사(集賢殿博士)가 되고 부수찬(副修撰)과 지제교(知製敎) 겸 세자 우정자(世子右正字)에 올랐다. 여러 번 승진하여 부교리(副校理)에 이르렀다. 1455년(세조 1)에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와 지제교(知製敎) 겸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와 세자 우필선(世子右弼善)에 제수되었다. 1456년에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로 옮겼다. 덕종(悳宗)이 동궁(東宮)에 있을 때 세조가 서거정을 좌필선(左弼善)으로 삼았다.
1457년에 중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특별히 통정대부(通政大夫) 사간원 우사간(司諫院右司諫) 지제교(知製敎)에 제수되었다. 1458년에 정시(廷試)에서 우등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참의(工曹參議)로 옮겼다. 같은 해에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옮기고 사은사(師恩使)로 명나라 북경에 갔다.
1461년(세조 7)에 가선대부(可善大夫)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오르고, 1463년(세조 9)에는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이 되었으며, 1465년에는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겸임하였다. 1466년에 발영시(拔英試)에 합격하여 예조참판에 제수되고 곧 등준시(登俊試)에 3등으로 합격하여 특별히 자헌대부(資憲大夫) 행 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에 가자(加資)되었고, 『경국대전』 찬수에 참여하였다. 1467년에 형조판서와 예문관 제학을 지냈고 이어 예문관 대제학과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를 겸임하였다. 이로써 문형(文衡)을 맡아 국가의 전책(典冊)과 사명(詞命)이 모두 서거정의 손에서 나왔다고 실록에 기록되었다.
1470년(성종 1)에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에 제수되었다. 다음해에는 순성명량좌리공신(純誠明亮佐里功臣)이 내려지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1472년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이 되었다. 1475년에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이 되고, 1476년에 낭중(郞中) 기순(祈順)과 행인(行人) 장근(張瑾)이 사신으로 오자, 서거정이 원접사(遠接使)가 되었다.
1478년에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을 겸대(兼帶)하다가 얼마 되지 않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되었다. 1479년에 이조판서(吏曹判書)를 맡아서, 송나라 때 제도를 인용하여 문과(文科)의 관시(館試)·한성시(漢城試)·향시(鄕試)에 일곱 번 합격한 자는 서용(敍用)하는 법을 세우기를 건의하고, 또 명경과(明經科)를 설치할 것을 주장하였다. 1481년에 병조판서로 옮기고, 1483년에는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이 되었다.
1488년(성종 19)에 향년 69세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세조가 서거정이 지은 칠언절구 16수를 보고 감탄한 일화가 전할 정도로 문장과 시에 탁월했다. 사은사, 원접사 등으로 중국 사신 등을 접할 때면 시를 겨루어 중국 조정에도 시문이 유명해졌다. 시문집으로 『사가집(四佳集)』이 전한다.
서울특별시 동작구 지역에는 세종 때 인물인 노한이 어머니를 기리며 살 던 곳에 세운 효사정이 있었는데, 서거정이 효사정에 대한 시를 남겼다. 서거정은 시에, “효사정이 노량 나룻머리에 있다. 풍수(風樹)를 생각한 마음 어느 날에 그치랴. 무덤엔 송추가 합쳐져서 상로(霜露)에 느낌이 일고, 시골은 상재(桑梓)가 무성한데 세월이 흘렀다. 감호(鑑湖) 주인 되어 사람이 길이 있고, 반곡(盤谷)을 전해 받아 지역이 그윽하다. 벼슬에서 물러나 여가가 많아서 난간에 기대니, 산과 물 푸른 것 둥실하네.”라고 하였다.
공동 찬집으로 『동국통감(東國通鑑)』·『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동문선(東文選)』·『경국대전(經國大典)』·『연주시격언해(聯珠詩格言解)』가 있고, 개인 저술로서 『역대연표(歷代年表)』·『동인시화(東人詩話)』·『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필원잡기(筆苑雜記)』·『동인시문(東人詩文)』 등이 있다.
[묘소]
서울특별시 강동구 방이동에 있던 묘소를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왕림리 산44-1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서거정의 시호는 문충(文忠)인데, 널리 듣고 많이 본 것을 ‘문(文)’이라 하고, 임금을 섬기는 데에 절의를 다한 것을 ‘충(忠)’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