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575 |
---|---|
한자 | 晋州姜氏 |
영어공식명칭 | Jinju Gang-ssi|Jinju Gang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우진 |
본관 | 진주(晋州) - 경상남도 진주시 |
---|---|
입향지 | 금주(衿州)|금천(衿川) - 서울특별시 동작구·금천구·관악구·영등포구 및 경기도 광명시 일대 |
세거|집성지 | 배나무골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41·42·7·71번지 |
성씨 시조 | 강이식(姜以式) |
입향 시조 | 강여청(姜餘淸)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지역에 세거하고 있는 성씨.
[개설]
신라 말과 고려 초기 강여청(姜餘淸)과 강궁진(姜弓珍)이 오늘날 서울특별시 동작구·금천구·관악구 지역인 금주(衿州)의 호족으로 성장하면서 금천 강씨로 분기했다.
[연원]
진주 강씨의 족보인 『진양강씨세보(晋陽姜氏世譜)』에 따르면 강이식은 598년 임유관(臨渝關, 臨楡關) 전투에서 수나라의 군량선을 격파하고 이로 인해 보급이 끊긴 수나라 대군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강이식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나 『구당서(舊唐書)』 등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나 신채호(申采浩)는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현재 전하지 않는 『서곽잡록(西郭雜錄)』과 『대동운해(大東韻海)』를 인용하여 강이식의 활약을 기술하였다.
시조인 강이식 이후 진주 강씨가 진주를 관향(貫鄕)으로 삼게 된 것은 강진(姜縉)이 진양후(晋陽侯)[진양은 진주의 옛 이름]로 봉해지면서부터이지만, 봉작의 시기와 주체에 대해서는 7세기 당나라와 9세기 신라의 두 가지 설이 전해진다. 전자에 따르면 강진은 676년(문무왕 16) 안동도호부가 한반도 밖 요동성(遼東城)으로 축출되기 전 과거에 급제하여 태중대부 판내의령(太中大夫判內議令) 등을 역임하다가 진양후에 봉해졌다. 또 다른 설에는 강이식의 6세손인 강택인(姜擇仁)이 839년(문성왕 1) 복업과(卜業科)에 급제하여 밀직제학(密直提學)·밀직부사(密直副使) 등을 역임하며 진안후(晋安厚)에 봉해지고 강택인의 아들인 강진이 875년에 숭인전(崇仁殿)에서 실시한 사운과(四韻科)에 장원 급제하여 진양후(晉陽侯)에 봉해졌다고 한다. 진주 강씨는 이후 고려를 거치면서 박사공파(博士公派), 소감공파(少監公派), 관서공파(關西公派), 은열공파(殷烈公派), 인헌공파(仁憲公派)로 분파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입향 경위]
진주 강씨의 세보(世譜)에 따르면 진주 강씨 인헌공파는 금천 강씨(衿川姜氏)와 같은 계열이다. 금천 강씨는 신라 문하시랑(門下侍郞) 강여청(姜餘淸)과 강여청의 4세손 강궁진(姜弓珍)이 금주(衿州)에 호족 세력으로 자리잡으면서 진주 강씨에서 분기하게 되었다. 진주 강씨 인헌공파의 인헌공(仁憲公)이 바로 강여청의 5세손인 강감찬(姜邯贊)이다. 금천 강씨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서도 조선 초기 경기도 금천현(衿川縣)의 여섯 토착 성씨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현황]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41·42·7·71번지 일대의 배나무골이라 불리는 마을에는 조선 후기까지 진주 강씨 50여 세대가 거주하고 있었으며 1990년대 말까지도 10여 세대가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씨·본관별 인구조사가 마지막으로 시행된 2000년의 인구총조사에서 진주 강씨는 서울특별시 동작구에 2,505 가구, 7,873명이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