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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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歌謠와 民謠의 사이, 「노들강변」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수현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 근처의 한강 변을 소재로 한 신민요.
[개설]
「노들강변」은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 주변의 한강을 소재로 한 문호월 작곡, 신불출 작사, 박부용 노래로 1934년에 오케레코드사에서 발매된 신민요이다.
[신민요 「노들강변」의 탄생]
서울특별시 동작구를 대표하는 민요로는 경기민요 「한강수 타령」, 운수 노동요의 하나인 「뗏목노래」 그리고 신민요 「노들강변」을 들 수 있다. 「한강수 타령」, 「뗏목노래」, 「노들강변」의 공통점 중 하나는 한강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서울특별시 동작구가 노들나루, 동작나루, 흑석나루가 있을 정도로 한강을 따라 펼쳐지는 곳에 있는 것과 연관이 깊다.
이 중 「노들강변」은 「한강수 타령」과 「뗏목노래」와는 달리 신민요(新民謠)이다. 신민요는 말 그대로 민요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새로운 민요라는 뜻이다. 조선 시대까지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 오던 노래로 대표적인 것인 민요, 판소리, 잡가 등이 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들어서면 새로운 장르의 노래들이 조선의 땅에서 인기를 얻게 된다. 다름 아닌 일본의 대중 가요인 엔카로부터 영향을 받은 유행가와 신민요가 그것이다. 신민요는 기존에 조선 땅에서 불려오던 민요에 서양 음악의 성격을 함께 결부해 창작한 대중 노래이다.
1934년에는 신민요가 대중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노들강변」을 필두로 「꽃을 잡고」, 「조선타령」 등의 노래가 그것이다. 민요와 달리 창작곡인 신민요는 작곡가와 작사가가 존재하는데, 「노들강변」의 작곡은 문호월이, 작사는 신불출이 담당하였다. 「노들강변」은 박부용의 노래로 1934년 1월 오케레코드에서 발매되어 세상의 나오게 되었다.
작곡자 문호월(文湖月)은 1908년 경상북도 김천 출생으로 「노들강변 노래비」가 있을 정도로 「노들강변」은 문호월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다수의 노래를 작곡한 것으로 알려진 문호월은 민요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신민요 역시 상당수 창작했으며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노들강변」 이외에도 「앞강물 흘러흘러」, 「닐리리 새타령」, 「명사십리」, 「장산곳타령」 등이 있다.
작사가 신불출(申不出)은 출생년도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1905년에서 1907년 사이에 출생한 것으로 보이는 인물이다. 신불출의 출생 시기나 고향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이유 가운데 하나는 신불출이 월북한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신불출은 공연 작가이자 배우뿐만 아니라 만담으로도 유명했던 당대 대중 예술가라 할 수 있는데, 대중 연극을 전문적으로 올리던 극단 취성좌에 들어가서는 「미인 포스타」, 「부세행진곡」 등을 발표하였다.
「노들강변」을 세상에 소리로 전달한 가수는 박부용(朴芙容)이다. 1901년 경상남도 창원에서 출생하여 기생으로 있다 가수가 된 인물이다. 이 시기에는 기생들이 민요를 비롯한 대중가요를 많이 불러 음반을 냈는데, 박부용은 그 중에서도 민요를 많이 부른 인물로 알려져 있다. 박부용이 부른 민요로는 「신개성난봉가」, 「신방아타령」, 「한강수 타령」 등이, 신민요로는 「노들강변」 이외에도 「신양산도」, 「신창부타령」 등이 있다. 「노들강변」이 1934년에 발매된 것을 감안한다면, 「노들강변」은 박부용이 30대 초·중반일 때 부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같이 문호월과 신불출 그리고 박부용이 만나 만들어진 「노들강변」은 1934년에 ‘오케레코드 창립 1주년 기념 특별호’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노들강변」의 내용]
이소영의 『20세기 한국음악의 혼종적 음악하기-신민요를 중심으로』에 소개된 「노들강변」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노들강변 봄버들 휘 늘어진 가지에다가 무정 세월 한 허리를 칭칭 동여 매어나볼까 에헤요 봄버들도 못 믿을 이로다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흘러 가노라
노들강변 백사장 모래마다 밝은 자죽 만고풍상 비바람에 멧번이나 지여갓나 에헤요 백사장도 못믿을 이로다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흘러 가노라
노들강변 푸른 물 네가 무슨 망녕으로 재사가인 앗가운몸 멧멧치나 데려갓나 에헤요 네가 진정 마음을 돌녀서 이 세상 싸인 한이나 두둥 싯고서 가노라
「노들강변」은 3절로 이루어진 노래로, 매 절마다 ‘노들강변’으로 시작하여 ‘에헤요’라는 사설이 반복되고 있는데, 「태평가」와 함께 경기민요적 성격이 강한 노래이다.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수양버들이 드리워진 어느 봄날에 노들강변을 바라보며 그간 마음에 담아두었던 여러 가지 감정과 회한을 물결에 흘려보내는 모습을 담은 노래로 볼 수 있다.
[「노들강변」의 현황]
1934년 박부용의 목소리로 세상에 들려지게 된 「노들강변」은 그 이후에도 꾸준히 여러 사람들에 의해 불려졌다. 신민요 가운데 사랑을 많이 받았던 곡들은 국악인들과 민요풍 노래들을 부른 대중가요 가수들에 의하여 지속적으로 불리게 된다. 「노들강변」 역시도 그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전문창자라 할 수 있는 국악인들에 의하여 「노들강변」이 불릴 때에는 두 가지 방향에서 대개 불리는데 하나는 민요의 성격을 강하게 부각해서 경기민요식으로 부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서양 양식의 특색을 반주나 편곡 등을 통하여 좀더 부각해 부르는 것이다. 대중 가요 가수가 부른 것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김세레나의 「노들강변」을 들 수 있다.
또한 악기의 구성이나 리듬, 청, 화성 등에 있어 같고 다른 점이 나타나지만 그럼에도 「노들강변」은 「울산큰애기」, 「조선팔경가」와 함께 남한과 북한에서 불리는 노래이기도 하다.
한편 신민요 「노들강변」은 1957년에 영화 감독 신경균에 의하여 영화 「노들강변」으로도 만들어졌다.
[「노들강변」에 대한 기억]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 주변의 한강이 ‘노들강변’이라고 불리게 된 데에는 ‘노들’이라 불리는 지역에 예전에 늙은 돌이 있어서 ‘노돌(老乭)’이라고 한데서 연유한 것이라고도 하며, 백로가 많이 오던 곳이어서 ‘노량(鷺梁)’이라 한 것에서 ‘노들’이 비롯되었다고 하는 등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와 같이 ‘노들’의 연원에 대한 이야기가 다양한 것처럼 신민요 「노들강변」은 창작곡임에도 불구하고 노래의 연원에 대한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실제로 「노들강변」은 문호월이 노들강변 근처를 지나다가 직접 창작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한국구비문학대계』에는 다양한 지역에서 「노들강변」을 가창자들이 부른 것뿐만 아니라 「노들강변」의 유래에 대한 이야기가 두 편 실려 있다. 경상남도 거창군에서 채록된 두 편의 이야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80년 12월 4일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에서 채록된 「노들강변 유래」에서는 「노들강변」의 유래를 한양에 과거를 보러 올라왔다 주점의 기생과 사랑에 빠진 한 남성이 과거에 낙방한 후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강 백사장에서 밤낮으로 놀다가 노자가 떨어져 고향에 갔다 다시 한양으로 올라오니 그 사이 홍수가 나 백사장 근처에 있던 주점과 기생이 사라져 버려 기생을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부른 것이라 이야기한다.
또 다른 1980년 5월 4일에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에서 채록된 「노들강변 처녀」에서는 「노들강변」의 유래를 옛날에 배우자를 스스로 찾겠다고 말한 처녀가 남편을 찾는다는 공고문을 내지만 아무던 오지 않던 차에 반신불수의 남성이 생활고를 겪던 중 혼인을 하겠다고 오자, 처녀가 귀신의 몰골을 하고 공동묘지에 남성을 데려가는 등 담력을 시험해보고 결국 이를 다 해낸 남성과 혼인을 하지만, 어느 해에 홍수가 나 남편이 떠내려가고 부인이 된 처녀가 백사장을 보고 남편을 떠올리다가 수양버들을 보고 ‘노들강변’이란 노래를 불렀다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두 이야기 모두 창작곡인 「노들강변」이 만들어진 상황을 실제 창작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노들강변」을 좋아하며 불렀던 구연자들의 문학적 상상력에 기반하여 새로 만들어 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이지만 크게는 사랑하던 님을 홍수로 잃은 이가 떠나보낸 님을 그리워하며 백사장에서 부른 노래에서 「노들강변」이 유래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노들강변」은 문호월과 신불출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1934년에 박부용의 목소리로 세상에 알려지면서 대중들로부터 사랑을 널리 받았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끊임없는 국악인들과 대중 가수들에 의하여 불리며, 대중들도 쉽게 따라 부르는 곡으로 자리 잡았던 곡이다. 시대가 변해도 보편적으로 있기 마련인 삶의 애환과 한을 대중들은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흘러 가노라’라는 「노들강변」 가사에 담아 보내면서 신민요 「노들강변」에 대한 기억을 만들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