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013 |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영실 |
[정의]
1950년 6월 25일 불법남침과 6월 28일 서울점령 이후 남진하려는 북한군의 한강도하를 38선 지역에서 후퇴한 국군이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의 한강대교 남안에서 학도의용군 및 일반인들의 도움을 받아 수행한 방어전투로 다수의 무명용사들이 전사한 기념지.
[한강과 동작동의 역사적 의미]
한강 유역은 고대로부터 인마(人馬)의 교통로로 역할을 하기도 하였지만, 그보다는 운송로로서의 기능이 강조되었다. 또한 삼남(三南)[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을 비롯한 남부지방과의 왕래에 있어 육상교통 부분에서는 큰 장애물이었지만, 도성방어(都城防禦)를 위해서는 자연적이 외곽방벽지대였다.
조선 시대에는 한강 유역이 선운(船運)의 중심지로 관선(官船) 보다는 사선(私船)의 활동이 더욱 활발하였는데, 사선을 소유한 경강상인(京江商人)들은 경강 변의 나루터인 노량진, 동작진, 한강진, 양화진, 서강, 마포, 용산, 두모포, 뚝섬, 삼전도 등지에서 출발하였다. 이후 17세기 후반부터 대상(帶狀)으로 상업이 발달하면서 용산, 마포, 서강, 서빙고, 두모포 등이 그 중심지가 되었으며, 서빙고는 한강을 건너 마주보고 있던 동작진을 통하여 수원으로 가는 도로의 출발점이 되었기 때문에 나룻배가 서빙고·동작진 간을 왕복하였다.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의 동명(洞明)은 조선 시대에 용산에서 수원으로 통하는 도진(渡進)의 하나였던 동작진(銅雀津) 근처 이남지역을 연결하는 나루로서 그 이름을 동재기나루터라 부른데서 ‘동작동’으로 명명하였다. 해방 후 1946년 8월 15일 서울시 헌장이 공포되고 정(町)을 동(洞)으로 개칭하였는데, 이때 동작정은 동작동으로 개칭되어 서울시 영등포구에 소속되었다. 그 후 1980년 4월 1일 대통령령 제9603호에 의해 서울특별시에 동작구가 신설되자 동작동은 동작구 관할하에 편제되었다.
[6·25전쟁 중 한강방어선 전투의 의의]
한강은 평균 강폭이 700~1,000m, 수심이 3.5m로 이곳은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시키는 데 천연자연물의 가치가 있었다. 1950년 6월 28일 서울이 점령당하고 북한군 제1군단[군단장 김웅] 하에 제3, 제4사단과 제105전차 여단은 한강도하를 준비하였다. 또한 북한군 제6사단은 경인가도를 차단하여 영등포에서 한강방어선을 형성하고 있는 국군의 좌측 공격을 계획하면서 인천항을 확보하려고 시도하였다.
이에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시키기 위하여 1950년 6월 28일 새벽 육군본부는 한강 이북과 이남을 잇는 한강인도교와 한강철교를 폭파하였다. 그리고 6월 28일 오전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육군본부를 수원농업시험장으로 이동시킨 후 광복군 출신인 육군참모학교장 김홍일 소장을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한강선 방어임무를 부여하였다. 당시는 북한군 전차가 6월 28일 새벽 1시에 미아리 고개를 넘으면서 서울의 첫 방어선이 무너진 시기였다.
김홍일 사령관은 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을 혼성 제7사단장, 수도사단장 이종찬 대령을 혼성수도사단장, 제2사단장 임선하 대령을 혼성제2사단장에 임명하여 한강 이남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혼성수도사단은 제8연대, 기갑연대 제1장갑대대 등이었고, 혼성제2사단은 제3연대, 제5연대, 제16연대, 보병학교 혼성연대[혼성대대], 기갑연대[제2기병대대] 등이었다. 혼성제3사단은 제22연대, 제25연대, 사관학교 생도대 등이었고, 혼성제7사단은 제1연대 혼성대대, 제9연대 혼성대대, 제25연대 혼성 제2대대, 제15연대 등으로 편성되었다.
시흥지구 전투사령부의 주요 작전지역은 여의도 비행장을 포함한 영등포, 노량진, 신사리에 이르러 오늘날 양화교에서 말죽거리를 잇는 선이었다. 혼성제7사단은 7개 대대 병력으로 노량진-영등포 간 강변지역과 동작동-노량진 간 고지 지대를 담당하였다. 혼성 수도사단은 3개 대대 병력과 1개 장갑대대, 57㎜ 대전차포 2개 소대로 김포 방면과 여의도 비행장을 포함한 영등포 지역을 담당하였다. 혼성제2사단은 신사리-말죽거리 방면에 배치되었고, 이산포-행주에서 도하하여 철수한 제1사단은 시흥에 집결하여 시흥지구 전투사령부의 예비대가 되었다. 혼성제3·5사단의 일부는 전방부대에 보강되어 한강 남안을 잇는 선에 배치되었다. 김포 지역에서는 김포지구 전투사령부[사령관 임충식]가 북한군 제6사단의 영등포 진입을 저지할 목적으로 준비하였다.
당시 시흥지구 전투사령부는 통신망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주로 혼성제7사단과 혼성수도사단이 방어하고 있던 지역에 집중하였고, 수원 육군본부는 관악산에 가로막혀 있던 혼성제2사단을 직접 지휘하였다.
김포지구 사령부는 독자적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6월 28일 북한군이 예상하지 못했던 김포반도로 도하하면서 김포비행장을 빼앗겼지만, 6월 30일부터 7월 3일까지 오류동 일대에서 북한군과 공방전을 지속하여 한강방어선 서측방으로 진출하려는 북한군의 기도를 저지시켰다.
6월 29일 미 극동군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H. MacArthur)가 한강방어선을 직접 방문하여 전황을 살피고 국군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이와 관련하여 맥아더 사령관의 한강방어선 시찰지 위치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길로 275 [영등포동]으로,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10-2-16호로 2015년 5월 29일 지정되었다.
29일 야간 북한군 제4사단은 여의도 방면으로, 제3사단은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 및 신사리 방면으로 도하를 시도하였고, 노량진 부근의 고지군과 능선을 장악하여 경인 상행선철교를 이용하여 전차를 도하시켜 한강선을 돌파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30일 새벽 북한군 제4사단이 여의도비행장 진입을 시도하였으나, 혼성수도사단의 저지로 무산되었다. 또 제3사단은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 일대와 신사리 방면으로 재도하를 시도하였지만, 혼성제7사단의 방어와 미 공군의 지원으로 실패하였다.
7월 1일 새벽 북한군 제4사단이 여의도-영등포 지역으로 도하를 시도하면서 노량진과 여의도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북한군은 경부선 철교를 확보할 목적으로 제5연대를 선두로 공격을 시도하였지만, 제8연대가 저지하였다. 북한군은 여의도 정면의 도하작전이 불가능해지자, 전차 지원의 필요성을 느끼고, 경부선 철교의 복구작업을 실시하였다. 혼성제2사단은 95고지 및 남태령 일대의 진지를 방어하였고, 제25연대는 판교 방향으로 침투한 북한군을 저지하였다.
7월 2일 국군은 영등포 진지와 노량진역 부근의 강변진지에서 북한군과의 공방전을 지속하였다. 북한군 제3사단은 노량진 대안에서 소강상태였고, 제4사단은 여의도비행장을 점령하였지만 남하를 못하고 전황은 소강상태였다.
7월 3일 북한군은 1개의 한강철교를 복구하여 105전차여단을 도하시킴으로써 한강 이남으로 진출하였다. 북한군 제4사단은 복구된 경부철도를 통하여 4대의 전차를 활용하여 후속병력으로 노량진과 영등포 일대를 침공하였고, 전차가 노량진으로 진입하고 말죽거리에서도 북한군 제3사단이 판교 방면으로 진출하면서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은 국군 주력부대를 부대별로 안양과 과천으로 후퇴시켰다.
시흥지구 전투사령부는 비록 한강방어선에서 철수하게 되었지만, 한강방어선 전투는 6일동안 북한군의 한강 도하 및 영등포 진출을 지연시킴으로써 국군은 분산된 병력을 수습하고, 미 지상군 참전의 시간을 확보하였다는데 의의가 있다.
[무명용사의 흔적]
6·25전쟁 이전부터 북한군의 국지적 도발과 각 지구의 공비토벌작전으로 전사한 장병들은 처음에 서울 장충사(奬忠祠)에 안치되었다. 그러나 전사자의 수가 점차 증가함에 따라 육군에서 묘지 설치문제가 논의되자 1949년 말 육군본부 인사참모부는 서울근교에 묘지 후보지를 물색하였는데,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묘지 설치문제는 중단되었다. 그리고 각 지구 전선에서 전사한 전몰장병의 영현은 부산의 금정사(金井寺)와 범어사(梵魚寺)에 순국전몰장병 영현안치소(英顯安置所)를 설치하여 봉안하였고, 육군병참단 묘지등록중대에서 관리하였다.
육군은 북한군과의 계속되는 격전으로 전사자의 수가 점차 증가하자 다시 육군묘지 설치 문제를 논의하였고,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주관 하에 묘지후보지 답사반을 구성하여 제1차로 대구지방, 제2차로 경주지구 일대를 답사하여 경상북도 경주시 형산강 지류인 천북 대안 일대를 육군묘지 후보지로 선정하였지만, 침수의 우려가 있어 이를 일시 중지하였다. 1952년 5월 6일에 열린 국방부 국장급 회의에서는 육군묘지 설치문제에 대하여 재 논의한 결과 육군묘지를 설치할 경우 다른 지역에서도 각각 군묘지를 조성하게 되므로 예산과 인원이 많이 소요되고, 영현관리의 통일성을 기할 수 없다는 문제점 등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육군묘지 설치 문제는 일단 보류하고 육·해·공군 3군을 통합하는 종합묘지 설치를 추진할 것을 결의하면서 묘지명을 ‘국군묘지’로 결정하였다. 1952년 5월 26일 국방부 주관으로 국군묘지 후보지 선정을 위하여 3군 합동답사반을 편성하고, 1952년 11월 3일 군묘지 설치위원회를 구성한 후 1952년 11월부터 1953년 9월까지 11개월 동안 7차에 걸쳐 10개 지역을 답사하였다. 그 결과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의 현 위치를 국군묘지 후보지로 선정하여 1953년 9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국군묘지 부지로 확정하고 1954년 3월 1일 정지공사에 착공하고 3년에 걸쳐 묘역을 조성하였다.
1954년 10월 30일 최초로 무명용사탑 및 무명용사문을 건립하였다. 1955년 7월 15일 군묘지 업무를 관장할 국군묘지관리소가 국방부 일반명령 제218호로 창설되었고, 1956년 1월 16일 무명용사를 최초로 안장하였다. 1956년 4월 13일에는 국군묘지 설치법령 제정[군묘지령, 대통령령 제144호]되었고, 동년 4월 19일 현충일이 제정되었다. 1957년 4월 2일 신분이 확인된 용사가 최초로 안장되었고, 1965년 3월 30일 대통령령 제2092호로 국립묘지로 승격되었다. 1967년 9월 30일 위패봉안관을 포함한 현충탑을 건립하였고, 1969년 4월 30일 현충문이 건립되었다. 1996년 6월 1일 현재의 명칭인 국립현충원이 되었다.
국립서울현충원 현충탑 내부에 설치된 위패봉안관은 총 면적 693㎡으로, 벽면 369.6㎡, 높이 4.1m의 구조로 되어 있으며, 영현승천상 지하에는 면적 148.5㎡의 무명용사 봉안실이 있다. 위패봉안관 위패 벽에는 첫째, 안장대상자로서 6·25전쟁, 베트남전쟁 등에서 전사·순직 사실이 확인되었으나, 유골 또는 시신을 찾지 못한 경우와 둘째, 사망당시 안장대상이 아니었던 자가 법령개정으로 안장대상자로 되었으나 유골이나 시신이 없는 자로서 2018년 11월 말 현재 102,196위가 새겨져 있으며, 현충탑 동문쪽에 설치된 부부위패판에는 2009년 4월부터 2018년 11월 말 현재까지 1,447위를 봉안하고 있다. 또한 영현승천상 지하 무명용사 봉안실에는 국군 전사자이지만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6,368위의 무명용사가 안치되어 있다. 그리고 2000년부터 시작한 ‘6·25전쟁 전사자유해 발굴사업’을 통해 발굴한 무명용사 1,126위는 이곳 지하 무명용사 봉안실에 안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