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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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웅호 |
[정의]
정조가 화성에 조성한 아버지 장헌세자의 묘소 현륭원을 참배하기 위해 한강을 왕래할 때 노량진에 설치한 배다리.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 추숭]
1776년 3월,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를 계승하여 왕위에 올랐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는 아버지가 1762년(영조 38)에 일어난 임오화변으로 죽임을 당함에 따라 ‘죄인의 아들’이라는 오명을 짊어지고 있었다. 영조는 이러한 정조의 왕위 계승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서인으로 강등되어 죽은 아들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고 세자 지위를 회복시키는 한편 정조를 큰아버지 효장세자(孝章世子)의 아들로 삼았다. ‘죄인’인 사도세자가 아닌, 효장세자의 아들이 되게 함으로써 외형상 왕위 계승에 문제가 없게 한 것이다.
정조는 즉위 직후부터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천명하고 “예법이 비록 엄격하지만 인정(人情) 역시 펴지 않을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영조의 유교(遺敎)를 준수하는 선에서 최대한 사도세자 추숭 작업을 진행하였다. 먼저 생부의 시호를 ‘사도’에서 ‘장헌(莊獻)’으로 바꾸어 ‘임오화변의 그림자’를 없앴다. 장헌세자의 사당 경모궁을 창경궁 동쪽에 있는 함춘원에 대대적으로 신축하고, 경모궁과 마주하는 창경궁 담장에 ‘월근문(月覲門)’을 만들어 자주 참배하며 생부를 추모하였다. 1789년(정조 13)에는 배봉산에 있던 생부의 무덤 영우원(永祐園)을 명당으로 알려진 수원으로 옮겨 왕릉에 버금가는 규모의 현륭원(顯隆園)으로 조성하였다. 또한 현륭원 조성으로 팔달산 아래로 읍치(邑治)가 옮겨가는 수원은 첨단 기법을 동원한 성곽과 행궁을 갖춘 신도시로 건설하였다. 신도시 주변에는 만석거(萬石渠)·축만제(祝萬堤) 등의 수리 시설을 쌓고 대유둔(大有屯)·서둔(西屯) 등의 둔전을 설치하여 신도시 운영에 필요한 재원을 독자적으로 마련할 수 있게 하였다. 정조는 아버지 묘소를 옮긴 후부터 해마다 현륭원을 참배하기 위해 노량진에 배다리를 놓고 수원[화성]으로 행차를 하였다.
[배다리 건설 경험과 건설 지침의 마련]
좀 더 안전하게 강을 건너고자 배다리를 설치한 것은 정조 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태종 때 마전포(麻田浦)[삼전도]에 배다리를 설치한 바 있고, 연산군 때에는 한강에 배다리를 놓고 건너가 청계산 일대에서 사냥을 하기도 했다. 1740년 영조가 개성을 방문할 때에도 임진강에 배다리를 놓고 건너갔다. 그러나 당시에 설치했던 배다리는 많은 배들을 촘촘하게 배열한 후 묶는 방식이어서, 배 간격을 일정하게 띠우고 긴 나무를 활용해 좌우의 배를 연결하는 정조 때의 방식과는 달랐다. 물론 국왕이 외방으로 거둥하기 위해 한강을 건널 때 배다리보다는 용주(龍舟) 또는 정자선(亭子船)이라 불리는 배를 타고 도강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배다리는 설치하는 데 물력과 인력 소모가 많았기 때문이다. 정조도 1779년 처음 한강을 건너 여주에 있는 효종의 영릉(寧陵)을 참배할 때 배다리 대신 용주를 탔다. 이때 정조는 광나루에서 용주를 탔는데, 용주 좌우에 예인선이 있어 용주를 끄는 방식으로 한강을 건넜다.
1789년(정조 13) 10월, 정조는 뚝섬에 배다리를 설치하였다. 배봉산에 있던 생부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면서 상여가 한강을 건널 때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만든 배다리는 큰 배 77척을 나란히 배열하여 대나무와 칡 끈으로 연결하고, 배 위에 모래와 흙을 깔고 잔디를 덮는 방식으로 이전의 배다리 설치 방식과 같았다. 이때의 경험이 계기가 되어 정조는 배다리를 효율적으로 설치하고 관리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을 시작한 것 같다. 정조의 고민은 배다리 담당 관청의 설립과 건설 지침의 마련으로 이어졌다.
같은 해 12월, 정조는 배다리 관리를 전담할 관청으로 주교사(舟橋司)를 설치하였다. 현륭원을 조성한 이후 해마다 이곳을 참배하기 위해 한강을 건너야 했기 때문이다. 주교사 관원은 별도로 임명하지 않고 준천사(濬川司) 관원이 겸임하게 하고, 배다리 설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충청도·전라도의 세곡을 운반할 권리를 준천사에 부여하였다. 배다리 설치에 필요한 각종 장비들을 보관하기 위해 노량진에 70칸 규모의 창고도 건립하였다. 주교사는 한강 남쪽에 위치했는데, 현재 한강대교 남단 언덕에 있는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 앞 인도변에 ‘주교사 터’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배다리 건설 지침을 마련하는 작업도 진행하였다. 먼저 왕명에 따라 묘당(廟堂)[의정부의 별칭]에서 21개 항목의 ‘주교절목’을 작성해 올렸다. ‘주교절목’을 검토한 정조는 해당 내용이 자신의 뜻과 맞지 않자 직접 『주교지남(舟橋指南)』이란 책자를 펴냈다. 『주교지남』은 첫머리에 실려 있는 정조의 어제문(御製文), 묘당에서 올린 ‘주교절목’의 21개 항목을 하나하나 비판한 ‘묘당찬진주교절목논변(廟堂撰進舟橋節目論辨)’, 그 대안으로 정조가 제시한 15개 항목 등으로 구성된 책자다. 그러나 『주교지남』의 저술로 지침 마련 작업이 종료된 것은 아니었다. 몇 차례 배다리 설치 경험을 반영하여 1793년(정조 17) 1월, 주교사에서 36개 항목으로 이루어진 ‘주교개정절목’을 작성해 올림으로써 마침내 지침 마련 작업은 완료되었고, 이후에는 이 절목 규정에 따라 배다리를 설치하고 관리하게 되었다. 1789년 10월 생부 장헌세자 무덤의 수원 이장을 계기로 본격화한 한강 배다리 지침 마련 작업은 1789년 말 묘당의 ‘주교절목’ 찬진, 1790년 2월의 화성 행차와 같은 해 7월의 『주교지남』 편찬, 1791년 1월과 1792년 1월의 화성 행차, 그리고 이상의 행차 경험과 지침을 종합화한 1793년 1월의 ‘주교개정절목’으로 완성된 것이다.
[1795년의 화성 행차와 배다리 설치]
1795년은 정조가 즉위한 지 20년이 되는 해이자 동갑인 장헌세자와 혜경궁 홍씨가 회갑인 해였다. 이에 정조는 1795년의 화성 행차를 국가 차원의 대규모 축제로 진행하고자 세밀하게 준비하였다. 먼저 1794년 12월, 행차 전반을 관장할 주관 기관으로 정리소(整理所)를 설치하고 책임자로 6명의 정리사(整理使)를 두었다. 행차는 1795년 윤 2월 9일 한양을 출발하여 같은 달 16일 다시 한양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화성에서는 대성전(大成殿) 전배(展拜), 낙남헌(落南軒)에서의 지역민을 대상으로 한 별시(別試) 거행과 양로연 실시, 현륭원 참배, 서장대(西將臺)에서의 야간 군사훈련, 봉수당(奉壽堂)에서의 회갑연 진행, 득중정(得中亭)에서의 활쏘기 등을 거행하는 것으로 계획하였다. 이동 경로는 과천 방향이 아닌 시흥 방향을 채택하였다. 혜경궁 홍씨 등이 타고 갈 가마도 별도로 제작하고, 노량진에 배다리도 설치하였다. 배다리 설치는 행차 전 달인 2월 13일 시작하여 24일에 끝마쳤다. 행차 진행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예행연습[습의(習儀)]도 철저하게 진행하였다. 배다리를 통해 한강을 건너는 예행연습인 ‘주교도섭습의(舟橋渡涉習儀)’는 행차 5일 전인 윤 2월 4일에 실시하였다.
배다리 설치 경험과 지침 마련 과정을 통해 정조 때 정비된 ‘배다리 제도’는 1795년의 화성 행차 때 십분 활용되었다. 배다리는 절목 규정대로 노량진에 설치하였다. 노량진은 남북 양쪽에 높은 언덕이 있어 선창(船艙)을 만들기에 적당하고, 강물의 흐름이 평온하며, 무엇보다도 강폭이 좁아 설치하는 데 물력과 인력의 소비가 적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량진은 온천에 갈 때, 삼성동에 있는 선릉(宣陵)과 정릉(靖陵), 김포에 있는 장릉(章陵), 현륭원을 갈 때 이용하고, 내곡동에 있는 헌릉이나 여주의 왕릉을 참배할 때에는 배다리를 광나루로 옮겨 설치하게 하였다. 배다리 설치에 사용할 배는 한강을 드나드는 개인이 소유한 배와 훈련도감 배 80척을 이용하였다. 이 중에서 큰 배 36척은 배다리 몸체를 만드는 데 들어가고, 나머지는 좌우에서 배다리를 고정시키거나 호위하는 용도로 사용하였다. 배다리의 정중앙에 오는 배의 높이가 가장 높고 남북 양쪽으로 갈수록 낮아지게 배치하여 멀리서 보면 무지개 모양이 되도록 하였다. 필요할 때 배를 쉽게 모으기 위해 각 배가 정박한 장소를 파악하여 주교사의 장부에 기록하였다.
배를 연결할 때에는 닻을 내린 상황에서 세로목인 종량(縱樑)과 가로목인 횡량(橫樑)을 활용하였다. 종량의 길이는 배 폭보다 약간 길게 하여 두 배의 종량이 횡량 위에 합쳐지게 하고, 겹쳐진 부분에 구멍을 뚫어 빗장을 지르고 칡으로 결박하였다. 배가 연결되면 그 위에 판자를 덮고 모래와 잔디를 깔았으며, 판자의 양쪽 끝에 추락을 방지하고 미관을 좋게 하기 위해 난간을 설치하였다. 밀물과 썰물 때마다 노량진 강물의 높이가 오르내렸으므로 배다리를 움직이지 않게 고정시키면 파손될 우려가 있었다. 이에 강물의 높낮이에 따라 움직이는 선창다리를 만들어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먼저 강의 양안에 잡석을 쌓고 그 틈을 석회로 메꾸어 선창을 만들고 선창과 배다리 사이를 선창다리로 연결하였다. 선창다리는 종량 위에 수십 장의 판자를 깔고 선창다리의 종량과 배의 종량을 연결시켰다. 이때 종량은 요철 모양으로 깎고 중간에 빗장을 질러 자유롭게 구부러지거나 펴지게 하였다. 배다리에는 중앙에 하나, 배다리가 시작되고 끝나는 남북에 각각 하나씩 3개의 홍살문을 설치하였고, 중앙의 홍살문 양 끝에는 두 개의 큰 깃발을 세웠다. 하나는 황색으로 중심을 표시하였고, 다른 하나는 검은색으로 수덕(水德)을 상징하였다. 36척의 배에도 깃발이 있었다. 뱃머리의 깃발에는 배의 소속을 표시하였고, 꼬리의 깃발에는 새매나 물새 그림을 그렸으며,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확인할 수 있는 풍향기도 세웠다.
1795년의 화성 행차를 8폭의 병풍으로 제작한 『화성능행도병(華城陵行圖屛)』 중 제8폭의 「한강주교환어도(漢江舟橋還御圖)」를 보면 당시 노량진에 설치한 배다리 모습을 그림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배다리는 정조 일행이 서울로 돌아온 다음날인 윤 2월 17일에 철거되었지만, 이후에도 정조뿐 아니라 그를 계승한 왕들이 한강을 건널 때마다 반복적으로 설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