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969 |
---|---|
한자 | 曺在千 |
영어공식명칭 | Jo Jaecheon |
이칭/별칭 | 일운(逸雲)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에서 활동한 법조인이자 정치인.
[가계]
본관은 창녕(昌寧). 호(號)는 일운(逸雲)이다.
[활동 사항]
조재천(曺在千)[1912~1970]은 1931년 광주에서 공립 중학교를 졸업하고, 1933년 3월 대구 사범 학교 강습과를 수료하였다. 그 뒤 전라북도청하(靑蝦) 공립 보통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하여, 1937년 4월 전라북도남원 공립 보통학교에서 퇴직하였다. 전라북도 산업부 농무과 촉탁이 되어 1938년 12월까지 근무하였다. 그 뒤 일본주오 대학[中央大學] 전문부 법학과에 진학하여 1940년 8월 조선 변호사 시험, 1940년 고등 문관 시험에 합격하자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1941년 1월 조선 총독부 사법관 시보로 광주 지방 법원에서 근무하였으며, 1943년 3월 평양 지방 법원 예비 판사를 거쳐, 1943년 7월 판사에 임명되었다. 조재천은 8·15 광복 후, 1946년 1월 서울 지방 검찰청 부장 검사로 재직하면서, 1946년 7월 조선 공산당의 '조선 정판사 위폐 사건'의 담당 검사로 활동하였다. 1948년 1월 철도관구 경찰청장, 1948년 9월 제1관구 경찰청장을 거쳐, 1949년 경상북도 경찰국장을 역임하다가, 1950년 1월 경상북도 지사로 임명되었으나 6·25 전쟁 중 퇴직하였다.
조재천은 1954년 제3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 민주 국민당 후보로 달성군 선거구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5년 『대구 매일 신문』최석채 논설 위원의 필화 사건 변론을 담당하였다. 1958년 제4대 민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대구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국회 내무 위원회에서 활동하였으며, 사사오입 개헌 때에는 개헌을 반대하는 호헌 동지회에서 활동하였다. 1960년 제5대 민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계속해서 당선되었다. 민주당 내각의 성립과 함께 법무부 장관에 임명되었고,1961년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5·16 군사 정변으로 퇴임하였다. 이때 발생한 황태성 간첩 사건에서 '황태성 생존설'을 계속 주장하였다.
1963년 12월 민주당 소속으로 제6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 전국구로 당선되었고, 1964년 민주당 부총재가 되었다. 1967년 민주당 총재로 추대되었으나 총선에서 민주당이 참패하자 정계를 은퇴하였다. 조재천은 1970년 7월 5일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