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8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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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曾魯 |
영어공식명칭 | Lee Jeungro |
이칭/별칭 | 이일심,이강동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삼조 |
[정의]
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이증로(李曾魯)[1898~1962]는 1898년 1월 15일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현내리에서 태어났다. 22살이던 1919년 4월 길림 군정사(吉林軍政司) 독판(督辦) 춘교(春郊) 유동열(柳東說) 총장에게 독립운동에 관한 취지를 듣고 경상남도와 경상북도 지방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로 진입하였다. 1919년 7월 중순경 이채우(李採雨), 김철(金喆), 김영순(金永淳), 이시우(李時雨) 등과 함께 서울특별시에 와서 「대한민국 길림 주재 군정사 독판 취지서」 30매를 인쇄하였다. 1919년 9월 권총 2정을 가지고 서울특별시에서 경상남도로 출발하기 직전 일본 경찰에 잡혔다. 당시 일제는 이 사건을 “독립 자금 충당과 지나[중화 인민 공화국] 지폐 위조 사건”이라 불렀다.
대구 지검에서 1919년 11월 24일 대정 8년 제령 제7호인 치안 유지법 위반, 명치 38년 3월 법률 66호 외국 통화법 위반으로 기소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되었다. 그런데 1920년 2월 15일 경성 지방 법원에서는 사문서 위조 행사, 정치범 처벌령 위반, 강도 예비라는 죄명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당시 경성 지방 법원 판결문에 나온 사건의 개요를 보면, “위조한 군령, 신임장을 휴대하고 군자금 모집을 위해 이만형에게 그 위조 문서를 보이고 군자금 모집 명의로 금원을 편취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출옥 후 1926년 중국 만주 동삼성(東三省)으로 망명하여 고려 혁명당(高麗革命) 간부를 지냈고, 신민부(新民府)에 소속되어 만주 길림성과 하얼빈 지방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독립운동 당시 이일심(李一心), 이강동(李江洞) 등이라는 이름을 사용해 일제 관헌의 감시를 피했다. 훗날 ‘독립 운동’ 자금 모집자로 검거되어 판결받을 당시 주소는 경기도 경성부 안국동 46번지[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로 적혀 있다.
[상훈과 추모]
이증로는 독립운동 공훈을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1989년 건국 포장, 1990년에 건국 훈장 애국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