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7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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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益馝 |
영어공식명칭 | Lee Ik Pil |
이칭/별칭 | 문원(聞遠),하옹(霞翁),전양군(全陽君),양무(襄武)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동곡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정의]
조선 후기 달성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문원(聞遠), 호는 하옹(霞翁). 고조할아버지는 생원 이종문(李宗文)으로 임진왜란 당시 창의하여 토벌한 공으로 군위 현감에 제수되었으며, 승정원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증조할아버지 이지영(李之英)은 문과에 급제하고 함길도 병마평사를 역임하였다. 광해군(光海君) 대에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으며, 사간원 사간에 증직되었다. 할아버지 이구(李球)는 문과에 급제하여 길주 목사를 역임하였고 사간원 대사간에 증직되었다. 아버지 이진주(李震柱)는 학행이 있었으나 일찍 사망하였다. 이에 순충보조공신 호조 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전흥군(純忠補祚功臣戶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全興君)에 증직되었다.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옥산 장씨(玉山張氏)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증손인 정랑 장구(張銶)의 딸이다. 친아버지는 무과에 급제하여 벽동 군수를 지낸 이시격(李時格)이며, 친어머니는 통덕랑 이엄(李䄋)의 딸 숙부인(淑夫人) 연안 이씨(延安李氏)이다. 부인은 통덕랑 정억(鄭檍)의 딸인 증정부인 해주 정씨(海州鄭氏)이다.
[활동 사항]
이익필(李益馝)[1674∼1751]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동곡리에서 출생하였다. 1703년(숙종 29) 무과에 급제하여 1710년(숙종 36) 선전관, 1711년(숙종 37) 부사정, 1712년(숙종 38) 훈련원 주부, 1713년(숙종 39) 도총 도사(都摠都事) 등을 역임하였다. 1714년(숙종 40) 평해 군수, 1718년(숙종 44) 부호군, 11월 죽산 부사, 1722년(경종 2) 2월 내금위장, 3월 선천 부사, 1725년(영조 1) 강계 부사, 금위영 천총(禁衛營千摠), 1727년(영조 3) 여주 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가 난을 일으키자 도순무사 오명항(吳命恒)과 함께 금위우별장(禁衛右別將)에 제수되어 토벌에 임하였는데, 양난 이후 계속된 태평세월로 인하여 병사들이 적진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자 항상 선봉에 나서서 독전하였다. 특히 죽산 전투에서는 금위좌별장 이수량(李遂良)과 더불어 용맹하게 싸워 난을 평정하였다. 그 공적으로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에 녹훈되고, 전양군(全陽君)에 봉하여졌다. 또한 1730년(영조 6)에는 전라도 운봉현의 진황전(陳荒田) 71부 2속과 전라도 강진현 고군내면 등의 진황답(陳荒畓) 1결 21부 1속을 사패 전답으로 지급받았다.
1728년(영조 4) 4월 전라 병사를 거쳐 1730년(영조 6) 9월 평안도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하지만 공신이 된 것을 기화로 횡포를 자행하다 1731년(영조 7) 고령(高靈)의 안림역에 3년간 유배되었고, 1733년(영조 9)에는 6년간 금고(禁錮)형을 받았지만 공신이었기에 곧 풀려나왔다. 1735년(영조 11) 부총관으로 복귀하여 곧바로 회령 부사에 제수되었으나 한 달 만에 금군 별장으로 이임하였다. 1736년(영조 12) 도총부 부총관에 임명되었고, 5월 춘천 부사로 부임하였다.
[학문과 저술]
문집으로 『하옹집(霞翁集)』이 전하는데, 1897년(고종 34) 전의 이씨(全義李氏) 인사들의 문집을 엮은 『전성 세고(全城世稿)』에 수록되어 있다.
[묘소]
묘는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금오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1751년(영조 27) 9월 12일 병조 판서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양무(襄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