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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오지랖도 넓어, 어려운 일도 보살피고 중앙탑 탑돌이도 주관하고-동가섭사 주지 혜성 스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E030401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마수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상기

혜성(慧成)[동가섭사 주지, 본명 玄炳錫] 스님을 만나는 일은 동가섭사를 두 번째 방문했을 때 가능했다. 지난 1월 절 마당에 눈이 남아있을 때 방문했지만 인연이 닿지 않았던 모양이다. 3월에 다시 절을 찾아 가니 며느리인 여현숙 씨가 나와 맞이한다. 여현숙 씨가 절 살림을 맡아 한다는 사실을 들어 알고 있지만 스님과의 인터뷰가 먼저라 스님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스님께서 허리가 불편해서 누워 계시다고 하면서 요사채로 안내한다. 방으로 들어가자 스님이 일어나 앉는다. 허리에 복대를 두르고 있다. 요즘도 가끔 병원을 다닌다고 한다. 스님이 일어나 앉자마자 어려운 이를 돌보고 있는 것에 대해 여쭈었다. 스님은 말씀하셨다. “돌본달 것도 없습니다. 1978년에 걸식하는 아이(별명: 꾀돌이)를 데려다 키운 것이 계기가 되어 그 다음부터 어려운 사람들에게 조금 도움을 주고 있을 뿐입니다. 그 아이는 정신지체아였습니다. 손발도 떨고 갈 곳이 없을뿐더러 정신적 육체적으로도 문제가 좀 있었습니다. 그래서 데려다 우선 이름을 이광선으로 지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교육을 시키려 했으나 그것은 잘 안되었습니다. 84년에 다행히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고 지금도 이 절에서 함께 살고 있습니다. 어떤 일을 맡아서 할 수는 없지만 청소, 농사일 등 간단한 일은 제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고 있습니다. 또 중학교에 다니는 딸도 하나 있어 이제 사람 몫은 하고 사는 셈이지요. 그 딸애 이름이 연미인데 현재 신니중학교에 다니고 있답니다” 라고 하였다. 나중에 보니 며느리 여현숙 씨의 방에서 컴퓨터도 하면서 놀고 있었다.

다음으로 스님의 고향과 어떤 계기로 불문에 들어오셨는지를 여쭈어 보았다. 스님은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원래 고향은 괴산군 청천면 대전리입니다. 1938년에 태어났습니다. 7살 때 부모님을 따라 옆 동네인 신니면 화안리로 이사를 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죽 살았습니다. 1959년에 군대를 갔다가 1963년에 제대를 했습니다. 제대를 하자마자 결혼을 했고 이듬해 아내와 함께 서울로 가서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1966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이 어찌나 허무하던지 잠시 방황하다 1967년 절을 찾아 부처님께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제가 제정신이 아니었는지 사흘에 한 끼만 먹으며 정진을 했습니다. 얼마 후에는 하루에 한 끼를 먹으며 정진을 하다 보니 뭔가 깨달음이 오는 것 같았습니다. 『묘법연화경』의 「법사품」 끝부분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近於佛智慧 若人說此經 부처님의 지혜에 가까이 가 사람들에게 이 경전을 설하려면

應入如來室 著於如來衣 여래의 방에 들어가 여래의 옷을 입고

而坐如來座 여래의 자리에 앉아야 한다.

處衆無所畏 이곳에서 중생은 두려움 없이

廣爲分別說 大慈悲爲室 분별의 가르침을 널리 알게 되고 대자대비한 방에 머물며

柔和忍辱衣 諸法空爲座 부드럽게 화합하고 참는 옷을 입고 모든 법이 공함을 알게 된다.

중생에서 조금은 깨달은 자로 변한 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967년 불가에 입문을 했습니다. 가섭산 밑에 있는 양진사(養眞寺)였습니다. 박명륜 스님이 창건한 절로 당시 황도일 스님이 계셨습니다. 그 후 백부께서 이 절을 맡았다가 저에게로 넘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1982년 가을 무 구덩이를 파다가 기와장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가정(嘉靖) 18년(1539) 화주(化主) 정초라는 명문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이 기록에 나오는 동가섭사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고는 절 이름을 동가섭사로 바꿨습니다. 1983년에는 율곡사업으로 절 지역이 수용되어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신도회장인 박기서 씨가 많은 역할을 했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스님이 중앙탑 탑돌이 행사를 주관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물었다. 이에 스님은 “1991년 시작했으니까 벌써 18년째입니다. 처음에는 불교의 진리를 알리고 포교하자는 뜻에서 시작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체육관에 탑을 세우고 주위를 돌면서 신도들과 함께 의상대사의 일승발원문과 화엄일승법계도의 법성게를 외웠습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런 후 발원문을 들려주셨다.

‘오직 바라고 또 바라옵니다.

그 어느 곳 어느 때에 태어나거나

생각과 말과 행동 세 가지 일이

한량없는 공양구(供養具)가 되어

시방삼세 온 세계에 가득 채워지이다.

불법승 삼보께 항상 공양하옵고,

육도의 중생 위해 보시하기 원입니다.

한 생각 한 가지 일이 불사(佛事)를 짓듯이

천만 가지 생각과 일, 또한 그리 되어지이다.

작은 악 하나부터 일체 악 끊고

작은 선 하나부터 일체 선 받들며,

한없는 선지식을 다 만나 뵙고,

항상 법문 들어 큰 기쁨 누리기 원합니다.

저 선지식들 큰마음 발하시듯

저와 중생 모두가 또한 그러하옵고,

저 선지식들 큰 일을 행하시옵듯

저와 중생 모두가 또한 그러하여지이다.

광대무변한 보현행을 다 구족하고

아름다운 연화세계에 가서 다시 태어나

비로자나 부처님 친견하리니,

모든 중생 다 함께 성불하게 하옵소서’

스님은 덧붙여서 말씀하셨다.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진리의 속성은 둥글고 원만해서 둘이 아니다)으로 시작하는 법성게는 생략하겠습니다. 좀 더 길고 어렵거든요. 그러다가 프로그램을 구상해서 시연을 하면 좋겠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6바라밀을 구상했습니다. 6바라밀은 보시(布施: 자비심으로 조건 없이 널리 베품), 지계(持戒: 계율을 지킴), 인욕(忍辱: 온갖 욕됨을 참음), 정진(精進: 항상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음), 선정(禪定: 마음을 고요히 하고 정신을 통일함), 지혜(智慧: 마음에 어리석음이 없게 하는 일)입니다. 이것을 암송하며 신도들과 함께 탑돌이를 했습니다. 탑돌이가 알려지면서 신도들도 많아지고 제대로 해보자는 의견이 일어 3~4년 전부터 탑돌이 장소를 중앙탑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6바라밀도 10바라밀로 확장을 했습니다. 6바라밀에 방편(方便), 원(願), 력(力), 지(智)를 더한 것입니다. 이렇게 10바라밀을 하며 탑돌이를 하면 1시간쯤 걸립니다. 이제 중앙탑 탑돌이가 어느 정도 정착된 것 같습니다. 중앙탑 탑돌이는 의식과 노래 그리고 춤이 결합된 종합예술입니다” 라고 하셨다.

이쯤 대화를 나누고 나오는 길에 다른 요사채에 있는 며느리 여현숙[1970~ ] 씨를 만나러 갔다. 얘기를 들으니 그녀는 절의 살림과 일체의 행정을 책임지고 있었다. 앞에 얘기한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것도 모두 그녀의 몫이었다. 아픈 사람들을 병원에 데리고 가야지, 경제적으로 어려워 찾아오는 사람들을 도와줘야지, 며칠씩 묵어가는 사람들을 보살펴야지, 자식들을 교육시켜야지, 이광선 씨네 가족 뒷바라지를 해야지, 정말 쉴 틈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별로 하는 일이 없다고 겸손해하였다. 마을 사람들의 말마따나 동가섭사는 여현숙 씨 때문에 굴러가는 것 같았다. 시아버지인 혜성 스님마저 몸이 불편하니 여현숙 씨의 일은 더 늘어날게 뻔하다. 다행히 중앙탑 탑돌이는 이웃 원평리에 있는 미륵정사 석대원 스님(충주시 사암연합회장)이 주관하게 되어 조금은 부담이 덜한 것 같았다. 마수리에 있는 절 동가섭사는 이렇게 혜성 스님이 이룩한 업을 며느리인 여현숙 씨가 이어받고 있었다.

[정보제공]

  • •  혜성 스님(남, 60세, 동가섭사 주지)
  • •  여현숙(여, 38세, 혜성 스님 며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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