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32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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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林栽洙 |
영어음역 | Im Jaesu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일성 |
[정의]
조선 후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평택(平澤). 충민공 임경업의 6세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증사복시정 임시망(林時望)이고, 할아버지는 참봉 임정좌(林廷佐)이다. 아버지는 증호조참판 임강원(林綱遠), 어머니인 비안박씨(比安朴氏)는 박정혁(朴廷爀)의 딸이다.
[활동사항]
1783년(정조 7)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고, 1784년 정조가 참석한 활쏘기 시험에 참석하여 6품직에 올라 훈련원주부로 승진했다. 1785년 도총도사(都總都事)에 이어 안악군수가 되었는데, 특명으로 덕천군수와 자리를 바꾸었다. 1787년 중화부사, 1790년 상주영장이 되었으며, 1792년 부산첨사, 1793년 삼화부사에 임명되었다.
1799년 전라우수사가 되었는데, 이 때 진영의 폐단을 바로잡는 데 노력하여, “고군산(古群山)의 7개 조목의 폐단 가운데에 3개 조목은 이미 조사하여 바로잡았고, 4개 조목의 일은 감사와 잘 처리할 계책을 연구하고 있다”고 상계하였다. 1806년 충청병사가 되었고, 1808년 체직되어 고향에 돌아왔다.
1811년 12월 평안도 농민전쟁, 즉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자, “나는 국은을 후하게 입었는데 지금같이 원조가 급한 날에 어찌 한가하게 집에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 서울로 올라가 1812년 2월에 정주목사(定州牧使)로 임명되었다. 정주는 홍경래 무리의 근거지로 야습을 하여 4월에 성을 함락시키고 수복하였다. 같은 해 12월 비변사에서 “정주의 전 목사 임재수는 비록 겉으로 드러난 특이한 공적은 없으나 공격과 수비의 노고가 있으니, 활과 화살을 나라에서 내려주어야 한다”라고 논의하여 순조(純祖)가 윤허하였다.
[묘소]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시 살미면 설운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사후 38년 뒤인 1856년(철종 6) 홍경래의 난 때의 군공으로 가선대부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훈련원도정 행절충장군 충청도병마절도사에 증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