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31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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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漢江流域-代表的民俗行事-牧溪別神祭 |
영어의미역 | Religious Service of Mokgye, Representative Folk Customs of Hangang River Valley |
이칭/별칭 | 목계별신굿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희찬 |
[개설]
목계별신제는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 지역에서 행해졌던 굿놀이를 말한다. 1940년대 중반까지 연행되다가 현재는 전승이 중단된 상태로 그 이름을 빌어 일부 재연 행사를 하고 있다. 본래 무당이 주재했기 때문에 목계별신굿이라는 명칭이 적합하겠지만, 현재는 별신제로 많이 칭하고 있어 목계별신제로 불러도 무방하다.
목계별신제는 목계 지역에서 행해진 목계 줄다리기와 함께 대표적인 민속 행사로 손꼽히며, 남한강 수운(水運)이 흥성했던 시기의 상권(商圈)과 연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수차례의 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남한강 수운의 최대 포구로서 기능했던 시기의 목계 상황과 목계별신굿의 연행 상황이 일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전의 별도 기록이 없기 때문에 현장 조사를 통해 확인한 자료들을 중심으로 목계별신제와 주변 정황을 함께 정리해보자.
[남한강 상류 최대의 상권 지역, 목계]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는 산계동(山溪洞), 목계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엄정면에 속한 법정리·동의 하나로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창말·웃말·묵밭골·건너말을 병합하여 목계동이라 하였다고 한다. 현재 목계는 목계1구와 목계2구로 구분되며, 목계1구는 다시 국도 19호선을 경계로 동계와 서계로 나뉜다. 목계1구의 동계에는 아랫말·고운말·구미·건너말·새터가 있고, 서계에는 새장터·옷말·창말로 구별하여 칭하고 있다. 목계2구의 자연 마을로는 안암목계·중계·마산 등이 있다.
목계는 남한강을 경계로 강 건너 편의 충주시 중앙탑면 장천리·가흥리와 마주하고 있다. 특히 가흥리는 조선시대의 조창(租倉)이었던 가흥창(可興倉)이 위치해 있던 곳으로 충청북도 북부권 및 강원도 남부권, 영남 북부권에서 모은 조세 운반의 보관지였으며, 동시에 수운을 이용하여 서울로 운반하던 출발지이기도 했다. 관창인 가흥창이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그에 따른 사람들의 왕래는 물론 조세의 수집과 운반을 위한 주요 수단으로 작용한 수운이 이 지역 일대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것이 조선 후기 상업의 발달에 따라 민간 상권이 형성되면서 목계를 중심으로 하는 남한강 상류 최대의 포구가 형성될 수 있었던 배경이다. 한창 전성기 때를 빗대는 말로 ‘가흥에 울치레요, 목계에 계집치레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목계의 상권은 대단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현상을 반영하듯, 주민들은 일제강점기 때 목계의 상황을 ‘목계에는 우체국이 있었고, 백화점이 있었고, 농업협동조합과 은행도 있었고…’라 자랑한데서 나타나듯, 목계는 상업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바로 이 시기에 목계별신굿이 흥행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해방 이후 수운의 이용이 저조해지고 6·25전쟁으로 목계는 쇠락한다.
목계대교가 건설되기 전에는 목계나루에서 도선으로 왕래가 이루어졌으며, 원주로 이어지는 국도 19호선이 지나가면서 그 명맥을 이어왔다. 현재는 목계 문화마을 조성 사업이 추진되고 있어 남한강 최대 포구이며 상업 지역이었던 목계의 명성이 문화적인 상징성을 가지며 부활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고 있다. 이에 따라 목계별신굿보존회도 활동하고 있어 그 기대가 더욱 크다.
[목계의 다양한 민속 층위]
목계는 남한강 변의 포구로 기능하면서 수운을 이용한 서울과의 소통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예를 들어 목계는 물건들이 분배되는 출발지이자 소금·새우젓 등과 바꾸어온 물건들이 모여 다시 서울로 가는 물산의 집결지이기도 했다. 마방이라든가 창고·권번집 등이 흥성했고, 그에 따라 영남·강원·충북 지역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곳으로 다양한 문화 교류가 이루어졌을 개연성이 큰 곳이다.
그러나 목계는 목계만의 고유한 민속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목계 부흥당 당고사이다. 목계 부흥당 당고사는 부흥산(富興山)에 위치한 당집에서 매년 정월 초아흐레에 마을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지내는 동제(洞祭)이다. 서낭각시를 모시는 부흥당 당고사와 함께 예전에는 용왕제인 뱃고사가 정월 열나흘에 행해졌다고 한다. 남한강 변 포구 마을로 성장해온 이력을 마을 중심의 동제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이 목계의 민속 층위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목계 줄다리기라는 놀이 문화가 얹혀진다. 줄다리기는 예전에 마을마다 행해졌다. 다만 목계 줄다리기는 어느 시기부터 줄의 규모가 커지고, 동편·서편의 편가름 범위가 넓어져 목계 상권 지역을 아우르는 정월 최대의 지역 축제 분위기를 가지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목계 민속 층위의 두 번째에 놓이는 행사이다. 여기에 목계별신굿이 3년 내지 5년 주기로 행해지면서 정월 보름을 전후해 2월 초순까지, 또는 4월 초파일 무렵에는 큰 구경거리가 마련되어 축제의 장이 펼쳐졌다.
목계의 민속 층위를 이렇게 나눌 수 있는 이유는 목계별신굿의 연행 상황으로 추정할 수 있다. 즉 목계별신굿을 벌이기 위해서는 나루 터를 중심으로 임시 당집이 마련되지만, 본격적인 굿판을 벌이기에 앞서 부흥당에 제를 올리고 서낭각시를 위시한 부흥당에 기거하는 신들을 모시는 것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목계의 민속 층위를 구성하는 단위는 마을 중심의 동고사인 목계 부흥당 당고사 → 상권 지역을 아울러 펼쳐졌던 목계 줄다리기 → 모두가 한판 어울려 놀 수 있었던 목계별신굿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목계 부흥당 당고사]
목계 부흥당 당고사는 목계마을에서 매년 정월 초아흐레에 지내고 있는 동제이다. 남한강 변의 부흥산에 위치한 부흥당에서 제를 지낸다. 목계 주민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며 지내는 목계 부흥당 당고사는 마을 공동체의 민간 신앙으로 자리잡고 있다. 부흥당은 본래 강나루에 접해 있었다고 하는 데, 도로 확장 공사로 현재 위치인 부흥산 중턱으로 옮겨 새로 지었다고 한다.
당내에는 서낭각시의 그림이 있고, 좌우로 산신도와 용왕도를 봉안하였다. 부흥당은 한강 유역에 분포된 민간 신앙인 부군당(府君堂)과 같던 것이 이곳의 산 이름을 따서 부흥당으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본래 목계 부흥당 당고사는 무당들을 불러 대규모로 거행되었는데 해방 전후기에 상경기가 침체되어 경비 염출이 어렵게 되자 마을 회의를 열어 유교식으로 간략하게 지내기로 결의한 후 일반 서낭제처럼 규모가 작아졌다고 한다.
‘당굿’이라고 했던 목계 부흥당 당고사는 정월 초열흘에 열렸다고 한다. 정월 초닷새 경에 당골무당이 광대와 악사를 데리고 와서 광대놀이를 하고 돈을 벌고, 초아흐레에는 각 가정을 돌며 축원을 해주고 곡식을 얻어 비용을 마련했다고 한다. 그날 저녁에 군관의 집에서는 안반(安盤)굿을 하였다고 한다. 고사 당일이 되면 원근에서 구경꾼들이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하며, 이날은 강추위가 내습하여 ‘당굿추위’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당고사의 제주는 생기복덕에 맞는 노인이나 이장이 되고, 돼지머리·삼색실과·제주·떡을 진설하여 자정에 지냈다고 한다. 헌작·독축·대동소지·각호소지 순으로 올리는데 일반 서낭제와 대동소이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당고사에 쓰인 축문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維歲次○○正月朔○○日○○
幼學○○○○ 敢昭告于
長針洞城隍之神 天地開拆 萬物旣成 山上益者無 神明人依于神依于 人神相和 崔無相助 謹奉香火 伏維尊靈 安保人産 富貴安寧 制祿萬福 大厄小厄 處處消滅 興班榮華 永世安保 五穀豐登 牛馬鷄犬 興盛繁華 謹以淸酌 脯醯福薦于神 尙饗(『충주중원지』, 1985)
維歲次 甲戌 正月 丙寅朔 初九日 乙亥 幼學代表 金顯海 敢昭告于
伏以城隍之神 太極肇判 陰陽始分 陽精爲人 陰精爲神 神佑人安 報以祀禋
五嶽四瀆 天子所巡 封內山川 諸侯是主 爰及叢灵 咸有廟于 里各有祭 神庶不怒
猗與尊灵 鎭此牧溪 雁嶽峰頭 南紀西伏 至于蘂北 各區是闢 山轉水回
深鎖洞□ 地旣勝矣 神亦灵否 鎭護此洞 降福無窮 維玆是月 爰潔秶盛 寔涓穀日
薦我微聲 神其格思 畀以百祥 國命挽索 勿問其方 陰祑茂祉 宅旺人寧
老安少懷 女績男耕 魑魅遠遯 盜窃屛息 五穀豊穰 六畜繁殖 八難驅除 百殃消滅
四時春和 洋洋盈溢 歆格 尙饗(1994년 조사 자료, 『충주시지』, 2001)
두 축문 모두 성황신(城隍神)을 신격으로 하여 제를 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의 것이 간단한 형식의 축문이라면 뒤의 1994년 축문은 보다 유교식으로 정제된 형식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원 내용 역시 두 축문 모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으로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
매년 정월 초아흐레에 행해지고 있는 현재의 목계 부흥당 당고사는 목계1구와 목계2구가 격년제로 순번을 나누어 담당하고 있다. 이장, 새마을 지도자 등 마을의 소임을 보는 사람들이 주가 되고, 대한경신회 충주지부에서 함께 참여하여 당고사를 돕기도 한다. 지금은 당고사만 지내고 있지만, 예전에는 남한강 변 나루 터에서 정월 열나흘이 되면 뱃고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목계나루를 중심으로 운행되었던 뱃길의 안전은 물론 건너편을 오가던 도선(渡船)의 안전을 기원하는 의미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마을이 처해있는 지리적 위치와 과거부터 내려오던 전통적인 습속이 정월의 당고사와 뱃고사로 귀결되어 마을의 민속층을 이루는 기초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월 풍속에서 마을 자체의 결속을 다지며 동민의 기원을 담아서 지내던 당고사의 풍습은 남한강 뱃길의 가장 중요한 포구의 의미를 부흥당이라는 당집에 담고 있으며, 이러한 전통은 시대 변화 속에서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목계줄다리기]
줄다리기에 대한 풍습은 과거 마을 단위로 모두 행해졌다고 한다. 또한 규모가 큰 지방 중소 도시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줄다리기도 행해졌는데, 충주 줄다리기나 제천 줄다리기, 단양 줄다리기 등에 대한 기록이 이를 반증한다. 이러한 줄다리기는 그 규모가 대단했던 것으로 전해지며, 목계의 경우 남한강 상권의 중심 포구로 기능하면서 줄다리기에도 그러한 영향이 줄의 규모 등에 반영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목계 줄다리기는 2~3년 주기로 정월에서 2월에 걸쳐 대규모로 행해졌다고 한다. 해방 이후 2회 정도 실시되었다가 단절되었고 1977년 이후 3회에 걸쳐 재현된 바 있지만 모두 관에 의해 주도되었고, 최근에는 목계를 중심으로 한 민속 복원 노력의 일환으로 두 차례 재연·연행되었다. 목계 줄다리기는 풍년을 기원하고 주민의 단결과 화합을 도모하는 것은 물론 목계 상권이 미치는 지역까지 아우르며 상권 진작을 위한 대규모 행사로 발전하였다.
가을 추수가 끝나고 겨울이 오면, 동편·서편 지역의 각 마을에서는 짚을 모으는 일부터 줄다리기 준비에 들어간다. 목계 인근의 충주 지역을 중심으로 짚을 모으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지역까지 가서 짚을 모아오기도 했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연스레 줄 매는 소식이 전파되었고, 정월이 되면 줄을 매는 작업이 시작되어 마을에서는 밤낮없이 줄 매는 일에 온정성을 쏟았다. 기왕의 조사를 보면 목계 줄다리기를 크게 네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먼저 발단으로 아이줄, 청년줄, 어른줄 순서로 줄이 커져가는 과정을 설명한다. 어린 아이들이 장난삼아 새끼줄로 시작한 줄다리기가 청년들의 중줄다리기로 커지고 마침내 귀줄다리기가 되었다고 한다. 정월 대보름 무렵부터 동편과 서편에서 각각 편장(便長)과 부편장 5~6명을 선발하여 경비 마련과 전체적인 지휘를 맡겼다고 한다.
임원이 선출되면 일은 급속도로 진전되어 가가호호에서 볏짚을 모으고 일부 주민들은 산에서 칡덩굴을 걷어 와서 줄 만들 준비를 한다. 재료가 준비되면 먼저 가는 새끼줄 여러 개를 꼬아 42개 줄을 합쳐 대개는 중줄 3개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것을 다시 한데 합쳐 어른들이 올라앉아도 다리가 땅에 닿지 않을 만큼 큰 줄을 최종적으로 만든다. 그런 후에 줄 전체를 새끼줄로 빈틈없이 둘러 묶으며 여러 사람이 다릴 수 있게끔 곁줄을 만든다. 완성된 줄의 길이는 100m 내외였다고 한다. 줄을 맬 때부터 동서 양편은 철저하게 경계를 했다고 한다. 마을 중간의 실개천을 경계로 하여 서로 왕래할 수 없고, 줄이 완성되면 매일 밤 줄을 지키기도 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상대편에서 건너와 줄 속에 바늘이나 칼날 같은 것을 넣어 일종의 방해를 하기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완성된 줄을 다리는 날에는 동편·서편 모두 부흥당에 가서 고(告)한 후에 강변으로 나갔다고 한다. 이 마을 민속의 핵심 층위에 놓인 부흥당의 위치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줄을 매고 서로 경계하던 것이 부흥당에 가서 고할 때만큼은 예외였다고도 한다. 편장의 지휘에 따라 보통 동편의 숫줄이 먼저 나갔다고 한다. 대장이 줄에 올라타면 별감은 앞에서 호위하고, 통인·책질입·여장·승려 등의 복장을 입고 그 역할을 하는 이들은 온갖 재주와 익살로 구경꾼을 매료했다.
줄다리기는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다. 백사장에 나간 줄은 먼저 줄머리를 안숙이려는 기 싸움이 벌어지는데, 결국 줄의 앞머리인 고를 중심으로 고싸움이 되는 것이다. 고싸움이 끝나면 암줄과 숫줄이 비녀목으로 연결이 되고, 그런 연후에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예비로 몇 차례 시행하고 결전에 들어가는데, 이때 동편·서편에서는 인근 지역에 청병(淸兵)을 하여 사람들이 운집하기 때문에 그 규모가 엄청나게 커지는 것이다. 동편은 엄정·산척·가금[현 중앙탑면]·충주 등지로 청병을 하고, 서편은 금가·가흥·소태·장호원 등지로 청병을 하였는데 제천·원주·서울 등 먼 곳에서도 찾아왔다고 한다. 청병에 참여한 마을에서는 농악대까지 대동하여 참가했는데, 농기의 숫자도 엄청났고 또한 구경꾼들로 인해 목계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축제 마당은 음주 가무로 5일 정도 큰 놀이판을 벌이다가 마지막 승부 날이 되면 결전을 펼친다. 승부가 쉽게 나지 않지만, 혹 줄을 당기다가 비녀목이 부러질 경우에는 서편(여성쪽)의 승리를 선언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승부가 나면 매어진 줄은 목계 강변에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줄은 여름 장마에 떠내려 보냈는데, 이때 두 줄이 떠내려가는 모양을 보고 그 해의 농사 풍흉을 판단했다고 한다.
전승이 중단된 목계 줄다리기는 1977년에 우륵문화제의 일환으로 목계 강변에서 재현된 바 있다. 또한 1984년에 충주에서 열린 제25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충청북도 대표로 출전하여 문화공보부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모두가 재현 상황이었고, 실제의 규모와 형식을 갖추기에는 불충분했으나 실제 참여 노인층들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그에 따른 간접 경험이 축적될 수 있었다.
목계 줄다리기의 경우 마을 단위의 핵심 민속층을 이루고 있는 목계 부흥당 당고사와 함께 마을의 집단 놀이로 존속해 왔으며 시대 상황에 따라 상권의 흥성에 힘입어 상권 지역의 축제로 발전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목계 줄다리기는 목계의 영향력이 커진 상황에서 주변을 아우르는 목계 민속의 중층에 위치했던 민속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최근에 목계 지역의 민속 복원 작업의 일환으로 줄을 재현하여 시연하는 행사들이 이루어지고 있어 현대적인 집단 놀이 문화로서의 부활도 기대해 볼 수 있을 전망이다.
[목계별신굿]
목계별신굿에 대한 수년간의 조사 결과를 종합해 볼 때, 완전한 재구가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된다. 가장 큰 이유는 목계별신굿을 구경했던 마을 사람들의 증언은 확보되고 있으나, 굿을 주재했던 무속 집단의 실체가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목계별신굿에 대한 지역민들의 기억이 목계 줄다리기 및 1970년대부터 임의로 재현된 현재의 목계별신제와 혼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목계별신제에 대한 기록은 마을 자체에서 건립한 유래비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유래비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이곳 목계는 오대산에서 발원한 남한강과 태백준령의 일지맥이 부흥산에 이르러 솔밭과 강변이 어우러져 태고시부터 큰 마을이 형성돼 뱃길로는 경도(京都)에, 뭍으로는 강원, 충청, 경상, 경기에 이르는 큰 길목이며 내륙 항구로 물화와 사람의 내왕이 끊이지 않아 항시 큰 저자를 이루니 팔도에 살기 좋은 오촌(五村)의 하나라 오목계(五牧溪)라 불리었고 경도와 해외의 신문화를 유입하던 곳으로 중원 문화의 발상지였다.
이에 남한강의 험한 뱃길의 무사안녕과 오곡풍성을 축원하기 위하여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고 줄다리기와 별신제를 펼치니 강변 백사장에 수만 군중과 풍물패 장사배들이 한데 얼려 천하제일의 장관을 이루었다. 줄다리기는 정월 초아흐렛날 대동제를 시발로 열나흩날 뱃고사인 용왕제 그리고 이월 보름날 줄다리기로 끝이 난다.
별신제는 사월 초파일 나루 터에 임시당집을 짓고 부흥당에 강신제와 영신굿, 송신굿의 순으로 막이 내린다. 줄다리기는 뱃고사를 지낸 후 동서 양계로 나뉘어 아기줄로 시작 차차 승벽이 커져 급기야 편장을 세우고 이웃 동네 청병 짚을 모아 평산과 샘터산에서 각각 용줄을 드린다.
용두는 7척에 메기수염을 달았고, 용신은 백 여 척에 상중석회를 붙였으니 마치 용이 살아 꿈틀거림과 같았다. 용줄이 산줄기를 타고 백사장에 옮겨질 때는 꿩의장목을 한 중앙깃대와 풍물패를 선두로 남색기를 든 숫줄꾼과 홍색기를 든 암줄꾼이 어깨에 메고 장군복을 한 편장은 노란 띠에 공작모를 쓰고, 별감 통인 책질 여장복 중복들을 호령하며 경계선에 이르러 치열한 선두 다툼 끝에 숫줄이 앞서 백사장에 이르고 수삼일 후 비녀목을 지른 후 한판 승부를 벌인다. 이 줄다리기가 끝나면 동민들은 그 동안 정성을 다했던 줄을 한강물에 흘려보냈으니 아! 이는 임진년 탄금대의 신립 장군과 장병들의 수중고혼을 위로함이 아닐런지. 별신굿은 항구 도시며, 육로의 요람으로 반농, 반상읍(半商邑)인 목계에 수호신을 모시고 상선의 안녕과 마을 번영을 축원하는 대동제의 한마당이었다.
나루 임시당집에서 큰무당과 사당패를 불러 영신굿과 관등놀이 박첨지 꼭두각시 등을 펼치니 놀이의 대축제이다. 씨름과 난장판이 함께 벌어져 수만 군중이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놀음을 하나 관에서는 이를 막지 않았다. 이제 줄다리기와 별신제가 면면이 이어오기 수백년! 수천단의 볏짚과 만금을 아낌없이 봉사하고 수만인파를 질서있게 운용한 협동 단결심이 오목계와 더불어 목계인의 자긍심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1984년 제25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줄다리기가 재현되어 문화공보부장관상을 수상하다. 이에 우리 조상들이 걸어온 삶의 역사의 현장을 길이 전하고자 동민들의 정성으로 목계인 김경열(金敬烈)이 돌을 구하여 부흥산 아래 이 비를 남기노라. 글엮은이 우범성(禹范成), 1988년 8월 김경열 세움”
이상의 기록을 참고로 현장 조사를 통해 확인된 사항을 보면, 목계별신굿은 5년 주기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여진다. 목계 상권의 진작과 함께 상권 집단의 후원에 힘입어 행해졌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즉 서울의 경강상인 집단이 주축이 되고 이들의 후원을 받은 무속인 집단이 목계에 와서 큰 굿판을 벌였던 것이다. 마을에서는 목계별신굿이 벌어질 때 난장이 섰다고 하며, 그에 대한 관리를 마을 자체에서 했다고 한다. 목계 상권 지역을 아우르는 큰 굿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그 목적 역시 상권 진작을 통한 위무 또는 상업 진흥에 두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정확한 시작 시기를 속단하기는 어렵지만, 20세기 초·중반에 남한강 수운을 이용한 민간 상업 활동이 이루어지면서 그 상권 중심에 있던 목계를 거점으로 여긴데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현상은 목계 상권이 붕괴되면서 사라진 것에서도 반증되며, 외부 상인 집단에 의해 주도되었기에 목계 내에서는 그것을 구경했던 기억만 어렴풋 가지고 있는 것에서도 반증된다.
목계별신굿은 목계가 가진 특수한 상권에 힘입어 이루어졌던 축제였다. 목계 부흥당 당고사와 목계 줄다리기가 본래부터 있어왔던 마을 자체의 행사였다면, 상권 진작과 함께 목계 줄다리기의 규모가 커졌으며, 또한 상권 중심 지역에서의 축제로 목계별신굿이 연행되었던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목계별신굿은 목계의 성쇠와 궤를 같이하며 한때 목계의 영향력을 최대한 반영했던 목계 민속 층위의 가장 큰 외연을 형성한 결과물로 볼 수 있다.
목계별신굿은 본래의 연행 방식을 알 수 없으나, 일부 충주 지역의 대한경신회를 중심으로 재현되고 있다. 그러나 그 형태에 대한 고증이 선행되지 않은 새로운 행사로 여겨지며, 이는 우륵문화제를 통해 격년으로 시연되어 그 이름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