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14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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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子明 |
영어음역 | Yu Jamyeong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구완회 |
[정의]
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문화(文化). 평양감영 주사(主事)를 지낸 유전의(柳全義)의 증손이다. 할아지는 유개원(柳開源)이며, 아버지는 유종근(柳鍾根), 어머니는 이근흥(李根興)의 딸 전의이씨(全義李氏)이다.
[활동사항]
유자명은 1919년 삼일운동 당시 충주간이농업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학생 중심의 시위를 준비하다가 사전에 탐지되자 상해로 망명하였다. 망명하기 전에 이병철(李秉澈), 안재홍(安在鴻) 등과 함께 청년외교단을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충청도 대표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는 한편 나석주(羅錫疇)의 소개로 김원봉(金元鳳)이 주도하던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항일활동을 전개하면서 아나키즘(무정부주의)의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1927년 2월 중국인·인도인 동지들과 남경(南京)에 모여서 아시아의 여러 민족이 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내고 독립을 하려면 모든 피압박민족이 연합하여 공동전선을 구성하고 제국주의자들과 싸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東方被壓迫民族聯合會)’를 조직하여 기관지 『동방민족(東方民族)』을 발간하고 비밀지부를 조직하는 등 조직활동에 몰두했다. 같은 해 5월에는 조선혁명자연맹(朝鮮革命者聯盟)의 간부로 활약하였고, 1930년 4월에는 장도선(張道善), 정해리(鄭海理) 등과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결성하였으며, 이듬해 11월에는 무정부주의자 유기석(柳基石), 정치화(鄭致和) 등과 ‘불멸구락부(不滅俱樂部)’를 조직하여 독립 투쟁에 가담했다.
중일전쟁 이후 국공합작이 추진되고 항일의 분위기가 고조되던 1937년 12월 김원봉과 함께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창립하고 민족통일전선을 주장했다. 1938년 무한(武漢)에서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가 발족했을 때에 이를 지도했으며 계림(桂林)까지 종군하였다. 1939년 중경(重慶)으로 이동하여 김구(金九)가 이끄는 보수적 민족주의자 세력과 김원봉이 이끄는 좌파적 운동세력을 항일전선으로 결집시키는 연합을 주선해냈다.
1942년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약헌개정기초위원(約憲改正起草委員)을 역임하였으며 1943년 3월에는 임시정부 학무부 차장에 임명되었고 광복시까지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해방 후 한국전쟁 때문에 귀국을 포기하고 이후 중국에서 농학자로서의 길을 걸었다.
[저술 및 작품]
자서전으로 1984년에 출판한 『나의 회고(我的回憶)』가 있으며, 원예학 관련 도서로 1959년에 출판한 『중국에서 유명한 몇 종의 화훼』와 1980년에 출간된 『원림화초(園林花草)』가 있다.
[상훈과 추모]
1968년에 대한민국 대통령표창을 받았으며, 197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3급 국기훈장을 받았다. 사후인 1991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