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14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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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寅普 |
영어음역 | Jeong Inbo |
이칭/별칭 | 경시(景施),경업(經業),담원(薝園),미소산인(薇蘇山人),수파(守坡),위당(爲堂)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김세영 |
[정의]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활동한 학자이자 교육자.
[개설]
정인보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조선 명종 대의 대제학인 정유길(鄭惟吉)의 후손으로, 철종 대의 영의정 정원용(鄭元容)의 증손인 장례원부경과 호조참판을 역임한 정은조(鄭誾朝)의 아들이다. 30여 년을 대학 강단에서 보내며 실학, 양명학, 역사학 등을 후학들에게 지도하였고, 높은 학덕으로 존경받았던 학자이자 교육자이다.
[활동사항]
정인보는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고, 13세 때부터 이건방(李建芳)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조선 말기의 혼란함 속에서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부모와 더불어 진천(鎭川), 목천(木川) 등지에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1910년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 동양학을 전공하면서 신채호, 박은식, 신규식, 김규식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여 독립운동과 동포들의 계몽에 힘썼다.
1918년부터 연희전문학교·이화여자전문학교·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중앙불교전문학교에서 동양학 및 국학을 강의하였으며, 『시대일보』와 『동아일보』에서 논설위원으로 있으면서 총독부의 정책을 비판하여 국혼(國魂)을 환기시켰다. 1926년 순종이 승하했을 때 유릉지문(裕陵誌文) 찬술의 일을 맡아보았다. 1935년 조선 후기 실학 집대성자인 다산 정약용의 서거 100주년을 맞아 조선 후기의 실학을 소개하기 위한 학문행사를 주도하였다.
1938년 연희전문학교에서 사임하고 전북 익산에서 은거하던 중에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 후에는 남조선 민주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으나 곧 탈퇴하고 국학대학의 초대학장을 지냈으며 초대 감찰위원장이 되었다가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1950년 9월 7일 황해도 서흥에서 폭격으로 사망하였다고 전한다.
[저술 및 작품]
정인보는 시문과 사장(詞章)의 대가로 해방 후 전조선문필가협회의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서예에 있어서도 일가를 이루었으며, 인각(印刻)에도 능하였다. 1931년 민족문화의 유산인 고전을 민족사회에 알리고자 「조선고전해제」를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다. 저서로는 1933년 간행된 『양명학연론』과 1946년 간행된 『조선사연구』가 있으며, 시문과 국학 연구 관련 저술로는 『담원시조집』, 『담원문록』, 『담원국학산고』 등이 있다. 1983년에는 정인보의 저술을 모은 『담원정인보전집』이 발간되었다.
[상훈과 추모]
1990년 대한민국건국훈장이 추서되었으며, 1991년 11월 21일 납북독립유공민족지도자 15위에 대한 추모제전을 거행하고 정인보의 위패를 국립묘지 충열대의 납북독립유공자제단에 모셨다. 묘소는 본래 평양시 형제산구역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특설묘지에 조성되어 있었는데, 2003년부터 재북인사 62인의 묘역을 재조성하면서 평양시 용성구역 용궁1동에 있는 재북인사 묘역 내로 다시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