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10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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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洪聖輔 |
영어음역 | Hong Seongbo |
이칭/별칭 | 유량(幼亮),삼성와(三省窩)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성호 |
[정의]
조선 후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유량(幼亮), 호는 삼성와(三省窩)이다. 충주시 금가면 하담리의 하강서원(荷江書院)에서 향사하고 있는 대사헌 홍이상(洪履祥)의 후손이며, 증조부는 예산현감 홍주문(洪柱文), 조부는 강원도관찰사 홍만종(洪萬鍾), 아버지는 생원 홍중화(洪重華), 어머니는 심윤원(沈胤元)의 딸이다.
[활동사항]
12세에 부모를 여의고 스스로 분발 면학하여 1710년(숙종 36) 사마시를 거쳐 1714년(숙종 40) 장령참봉이 되었다. 1721년(경종 1)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설서·병조좌랑·문학을 거쳐 1726년(영조 2)에는 정언·지평을 역임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수찬으로 경연검토관·부교리를 겸했다. 이어 광주부윤이 되었으나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노론이 화를 입게 됨에 따라 파면되었다.
1728년(영조 4)에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북로안무사 윤헌주(尹憲柱)의 종사관으로 공을 세워 지제교·병조정랑을 거쳐 동지사의 서장관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동래부사로 나갔다가 1731년(영조 7)에는 교리·수찬을 역임하였으며 이듬해에는 강계부사(江界府使)가 되었다.
이어 공조·형조의 참의를 지냈으며 1735년(영조 11)에는 승지, 그 이듬해부터 대사간·판결사(判決事)·무주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741년(영조 17) 영월부사로 지낼 당시 단종이 죽자 강물에 투신자살한 시녀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민충사(愍忠祠)를 지어 매년 한식제(寒食祭)를 올리게 하였다.
[묘소]
묘소는 충주시 산척면 송강리에 있으며, 유척기(兪拓基)가 지은 비명(碑銘)이 있다.
[상훈과 추모]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