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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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植 |
영어음역 | Yi Sik |
이칭/별칭 | 여고(汝固),택당(澤堂),남궁외사(南宮外史),택구거사(澤癯居士),문정(文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성호 |
[정의]
조선 중기 충주목사를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
[가계]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남궁외사(南宮外史)·택구거사(澤癯居士). 고조할아버지는 좌의정을 지낸 이행(李荇)이고, 아버지는 좌찬성을 지낸 이안성(李安性)이다.
[활동사항]
1609년(광해군 1) 생원이 되고, 다음 해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설서(設書)를 거쳐, 1616년(광해군 8) 폐모론(廢母論)이 있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학문에만 전념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기용되어 이조좌랑이 되고, 1624년(인조 2) 부수찬·응교·사간·집의를 거쳐, 이듬해 대사간·대사성·좌부승지 등을 역임했다. 1631년(인조 9)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가 사친(私親)의 추숭(追崇)이 고례(古禮)가 아님을 논하다 좌천되어 간성현감에 이어 충주목사가 되었다. 1633년(인조 11) 부제학을 거쳐, 1638년(인조 16) 대제학·예조참판을 지냈다.
1642년(인조 20)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척화(斥和)를 주장한다고 하여 청나라 심양에 잡혀갔다가 돌아올 때 다시 의주에서 구치되었으나 탈출하여 돌아왔다. 1643년(인조 21)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이 되고, 이후 대사헌과 형조판서·이조판서·예조판서를 역임했다. 1646년(인조 24) 별시관으로서 출제한 시제에 역의(逆意)가 있다고 하여 관직이 삭탈되었다.
[학문과 사상]
이식은 『성리대전(性理大全)』과 『주자어류(朱子語類)』를 중심으로 학문을 하였는데, 제자백가와 예학에도 밝았다. 당대의 학자로서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한문학에 정통하여 이정구(李廷龜)·신흠(申欽)·장유(張維)와 더불어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택당집(澤堂集)』, 『초학자훈집증집(初學字訓集增輯)』, 『두시비해(杜詩批解)』 등이 있으며, 『수성지(水城誌)』, 『야사초본(野史初本)』 등을 편찬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1686년(숙종 12)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경기도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에서 제향되고 있다. 충주목사로 재직시 선정을 베풀어 충청북도 충주시 교현동 문묘 앞에 선정비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