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8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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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尙夏 |
영어음역 | Gwon Sangha |
이칭/별칭 | 치도(致道),수암(遂菴),한수재(寒水齋),문순(文純)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현정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치도(致道), 호는 수암(遂菴)·한수재(寒水齋). 아버지는 집의(執義)를 지낸 권격(權格)이다. 형제로 우참찬(右參贊)을 지낸 권상유(權尙游)와 권상명(權尙明)이 있다.
[활동사항]
송준길(宋俊吉)과 송시열에게 배우고, 1660년(현종 1) 진사가 되었다.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던 중, 1668년에 스승 송시열이 좌의정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우의정을 사직하자 유임시킬 것을 상소하였다. 1659년(효종 10) 자의대비(慈懿大妃) 복상 문제로 스승 송시열이 관작을 추탈당하고 1675년(숙종 1) 덕원(德源)으로 유배되며 남인들이 집권하자, 벼슬을 버리고 청풍(淸風)의 산중에 은거하여 학문에 힘쓰고 제자들을 모아 유학을 강론하며 정주(程朱)의 서적을 교정했다.
숙종 재위 중에,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다가 그 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고,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득세하는 등 서인과 남인 간에 당쟁이 치열하였으나, 이에 초연하고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득세하여 송시열이 다시 제주에 안치되고 사약을 받게 되었을 때, 유배지로 달려가서 이별을 고하고 스승의 의복과 책을 유품으로 받아 돌아왔다.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괴산의 화양동(華陽洞)에 만동묘(萬東廟)를 세워 임진왜란 때 파병해 준 명나라의 신종(神宗)과, 명나라가 망하자 자살한 의종(毅宗)을 제향하고 숙종의 뜻에 따라 대보단(大報壇)을 세웠다. 1715년 『가례원류(家禮源流)』의 저작권을 둘러싸고 윤선거(尹宣擧)와 유계(兪棨)의 후손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자, 그 서문에서 유계의 저술임을 밝혀 소론의 영수 윤증(尹拯)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또 송시열이 화를 당한 것은 “윤증이 윤휴(尹鑴)의 무리와 함께 조작한 것”이라고 송시열의 비문에 기록하여 유생 유규(柳奎) 등 8백여 명과 대사간 이관명(李觀命), 수찬 어유구(魚有龜) 등 소론 측으로부터 비문을 수정하라는 항의를 받기도 하였다. 숙종의 총애를 받아 1703년(숙종 29) 찬선(饌膳), 이듬해에 호조참판에 임명되었다.
또한, 1716년까지 13년간 해마다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며, 이조참판·판윤·이조판서를 거쳐, 1717년(숙종 43) 좌찬성에 이어 우의정·좌의정이 되었고, 1721년(경종 1)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나가지 않다가,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사상]
송시열의 제자 가운데 김창협(金昌協)·윤증(尹拯) 등 출중한 자가 많았으나, 권상하는 스승의 학문과 학통을 계승하여 뒤에 ‘사문지적전(師門之嫡傳)’으로 불릴 정도로 송시열의 수제자가 되었으며, 그와 같은 학문적인 위치로 인하여 정치의 소용돌이에 관련되기도 하였다.
권상하는 자신이 처한 정치적 현실에도 불구하고, 서경덕(徐敬德)·이황(李滉)·기대승(奇大升)·이이(李珥)·성혼(成渾) 등 선유(先儒)들로부터 제기된 조선시대 성리학적 기본 문제에 대하여, 성리학 자체의 학적 체계나 논리적 일관성의 문제를 새로이 검토하며 보다 철저히 규명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16세기에 정립된 이황·이이의 이론 중 이이·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畿湖學派)의 학통을 계승하고, 문인들에 의해 전개되는 호락논변(湖洛論辨)을 학파적 성격으로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권상하는 이이(李珥)를 조종(祖宗)으로 하여 송시열에게 계승된 기호학파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했는데, 이후 권상하의 문인 한원진(韓元震)과 이간(李柬)이 인물성편재(人物性偏在) 문제로 논쟁을 하자, 인과 물의 성이 동일하다는 이간의 학설인 낙론(洛論)에 대해, 인과 물은 성이 각기 다르다는 한원진의 학설인 호론(湖論)을 지지하였다. 이로써 논쟁이 더욱 확대되어 기호학파는 마침내 양분되었다.
인성·물성의 상이론(相異論)을 주장한 발상은 본성을 후천적인 것, 즉 기질의 다름에 따라 달리할 수 있는 것임을 주장하여 동물성으로부터 분별, 보호하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본성의 문제를 물성과 관련하여 이해하려는 태도는 인성론이 자연물에까지 확대된 형이상학적 전개로서, 이황·이이 이래 조선 성리학의 이론적 발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17세기 이후 성리학이 예학(禮學)에 의하여 구체적인 사회 규범으로서 경직되어가는 학문 풍토에서, 인성·물성 상이론의 제기는 예학적 학문 이론을 활성화하고 심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권상하는 이단하(李端夏)·박세채(朴世采)·김창협 등과 교유하였으며, 문하에서 배출된 특출한 제자로는 한원진·이간·윤봉구(尹鳳九)·채지홍(蔡之洪)·이이근(李頥根)·현상벽(玄尙璧)·최징후(崔徵厚)·성만징(成晩徵) 등 이른바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가 있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한수재집(寒水齋集)』, 『삼서집의(三書輯疑)』 등이 있는데, 『한수재집』은 1979년 양장으로 영인, 간행되었으며, 가전(家傳)되던 영정을 싣고 있다. 글씨에 능하여, 작품으로 「기백이태연표(箕伯李泰淵表)」, 「형참권극화표(刑參權克和表)」, 「부사과이숙표(副司果李塾表)」 등이 전한다.
[묘소]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손동리 속실에 있다. 묘갈(墓碣)은 송환기(宋煥基)가 지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충주 누암서원(樓巖書院), 청풍 황강서원(黃岡書院), 제천 황강영당(黃江影堂)·수암사(遂庵祠), 정읍 고암서원(考巖書院), 성주 노강서원(老江書院), 보은 산앙사(山仰祠), 예산 집성사(集成祠), 송화 영당(影堂) 등에서 제향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