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508 |
---|---|
한자 | 忠州史庫 |
영어의미역 | The Historic Storehouse in the Chungju |
이칭/별칭 | 외사고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최일성 |
[정의]
고려 후기부터 조선 중기까지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 왕실의 중요한 서책과 문서를 보관하였던 창고.
[개설]
충주는 역사상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관방(關防)으로서 중요한 요충지이고 한강의 수운(水運)을 이용한 교통의 요지였다. 이 때문에 외적의 방어에 용이하고 교통이 편리하며 내륙 깊숙이 위치한 도시인 점이 고려되어 사고(史庫)가 설치되었다. 사고 관리는 충청도관찰사와 충주목사의 관할 아래 수호관(守護官) 5원과 별색(別色)·호장(戶長)·기관(記官)·고직(庫直) 각 1원을 두어 전담 관리하게 하였다.
서책의 충해와 습기를 방지하기 위하여 매 3년마다 춘추관의 기사관(記事官)을 포쇄관으로 파견하여 포쇄토록 하고, 그 결과를 형지안(形止案)을 작성하여 보고하게 하였다. 사고의 개패는 춘추관원이 하였으며, 충청도관찰사나 충주목사도 함부로 할 수 없었고, 국왕도 실록의 열람은 금지되었다.
[제정경위 및 목적]
고려시대에는 임금마다 그 사적을 실록(實錄)으로 만들어 소중하게 보관해왔고, 이의 보관을 위하여 궁내에 특별한 건물을 마련하여 실록각(實錄閣), 또는 사고(史庫)라 명명하여 왔다. 그런데 외적의 침입이나 내란 등 내우외환이 겹치면서 소중한 실록이 불타버리게 되자, 이의 안전한 보관을 위하여 고려 고종 때 궁중 외에 안전한 장소를 찾다가 경상남도 합천 해인사에 소위 외사고(外史庫)를 설치하게 되었다.
해인사의 실록은 몽고의 침략과 왜구의 창궐로 여러 곳을 전전하다 1390년(공양왕 2) 충주에 옮겨져 보관되었다. 그때부터 이곳은 충주사고로 명명되었고, 1445년(세종 27) 전주와 성주에 새로운 외사고(外史庫)를 설치하여 춘추관(春秋館)·충주(忠州)·전주(全州)·성주(星州)의 4사고가 이룩되었다.
[관련기록]
『세종실록(世宗實錄)』 권85에 따르면 “세종 21년 6월 26일조에 지금 사고는 충주에만 있는데 여년과 섞여 있사오니 실로 염려스럽습니다. 바라옵건대 조종의 실록과 전조(前朝)의 사적(史籍) 및 경서(經書)·제자서(諸子書)·경제조장서(經濟條章書) 몇 본을 만들어 각 도 명산에 나누어 간직하고 해마다 돌려가면서 포쇄하여 불우에 대비하게 하소서.”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충주목 궁실조 실록각(實錄閣)에는 “객관의 동남쪽에 있다. 본조의 실록을 간직하여 두고 3년마다 사관을 보내어 포쇄한다. 세조와 예종의 실록이 이루어져 세 건을 인쇄하여 외방의 사고에 나누어 두게 하였다. 계사년 가을에 신(臣) 희맹(希孟)을 보내어 충주·성주에 보관하고, 지사(知事) 신 양성지를 보내어 전주에 봉안하게 하였다. 실록이 모두 71책인데 다섯 궤에 나누어 넣어서 간직하는 일이 이미 끝났다.”라고 기록되었다.
[내용]
충주사고에는 고려 역대실록이 보관되어 세종 초 『고려사(高麗史)』 편찬 때 서울로 옮겨갔다. 『성송반악도(聖宋頒樂圖)』 같은 음악서, 『음양서(陰陽書)』 등은 1412년(태종 12)에 각각 전악서(典樂署)와 서운관(書雲觀)으로 옮겨가고, 『소아소씨병원후론(小兒巢氏病源候論)』, 『신농본초도(神農本草圖)』 등 의서, 『문선(文選)』, 『계원필경(桂苑筆耕)』 등 문학서, 『병요(兵要)』 등 병서, 『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와 『신당서(新唐書)』 같은 역사서 등은 춘추관으로 옮겨갔다.
『비보사사창립문적(裨補寺社創立文籍)』과 『주부군현산천형세(州府郡縣山川形勢)』는 관집사(觀集寺)로 옮겨지고 세종 때 지리지 편찬에 참고가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1421년(세종 3년)에 대명외교문서(對明外交文書)의 부본을 만들어 처음으로 충주사고에 보관하였다.
1431년(세종 13) 3월에 『태조실록(太祖實錄)』·『정종실록(定宗實錄)』·『태종실록(太宗實錄)』이 실록으로는 처음으로 충주사고에 봉안되기 시작하여, 13대 『명종실록』까지 조선 전기 13조의 실록을 봉안하였다. 이외에도 『시정기(時政記)』와 각종 역서·병서·사서 및 지석·옥책·상장의궤·비문 등 국가의 중요한 서책과 문적이 보관되었다.
[변천]
1227년(고종 14) 9월에 해인사에 설치된 고려의 외사고(外史庫)가 몽고군의 침입과 왜구의 난입으로 여러 곳으로 옮겨졌다 1381년(우왕 7) 7월에 충주 개천사(開天寺)로 옮겨져 약 2년간 있었다. 이것은 1383년(우왕 9) 죽주(竹州) 칠장사(七長寺)로 옮겨가고, 약 7년 뒤인 1390년(공양왕 2) 12월 다시 충주 개천사에 옮겨 약 30년간 존치되었다가 충주읍성 안으로 옮겨졌다.
충주성 내의 사고, 곧 실록각은 아사(衙舍)인 청녕헌(淸寧軒) 서쪽 객사(客舍) 서편에 있었다. 지금의 전신전화국 서쪽에 위치하였다고 추정된다. 그 후 1439년(세종 21)부터 전주사고가 새로 지어지는 1473년(성종 4) 전에 충주사고가 객사의 동남쪽으로 옮겨 다시 지어졌다. 지금의 성내동 사무소 동쪽 ‘성내동 453·454·455·456·457·458번지’ 일대에 위치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처음 사고는 충주성 내의 기존 건물에 실록을 보관하였으나 이 사고는 실록을 보관하기에 적합하지 않아서 새로운 사고(史庫)를 지어 실록을 옮겨 보관하였다. 새로운 사고의 규모와 구조는 아마도 성주사고와 같이 누각의 형태로 지어 사다리로 오르내리도록 하였으며, 습기와 화재를 방지하기 위한 특수 구조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현황]
고려 역대 실록을 보관하여 『고려사(高麗史)』 편찬의 사료가 되고, 조선의 역대 실록과 중요 문적을 보관해오던 충주사고는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으로 회진되어 다시 재건되지 못하고 역사적 사명을 끝내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고려는 내우외환의 병난에 대비하여 1227년(고종 14) 궁내사관 외에 별도로 외사고를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외적의 병난을 피해 해인사, 창선도, 진도, 선선 득익사, 예천 보문사, 죽주 칠장사, 충주 개천사 등으로 옮겨 다니면서 고려 역대 실록 등 중요한 전적을 보관해왔다. 고려 역대 실록은 『고려사』를 편찬하는 데 기본 자료가 되었다.
만약 충주사고가 훼손이 되었다면 조선 초 『고려사』 편찬은 불가능했을 것이고, 현재와 같은 고려시대의 역사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전주와 성주에 외사고가 지어지기 전에는 충주사고만이 있었고, 충주사고에 보관된 의서·병서·농서·음양서 등은 조선 초에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의방유취(醫方類聚)』 등 의서를 편찬할 때 참고자료가 되었다.
충주사고가 비록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지만 충주사고에 보관했던 중요한 서책은 여러 본 만들어 전주사고에 보관되었으므로, 그 서책은 지금도 볼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사고는 전쟁과 화재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깊은 산중에 설치하게 되었다.